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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장정일 시인 / 백화점 왕국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29.

장정일 시인 / 백화점 왕국

 

 

1983년 11월 한 달 간 산격동에 소재한 시영 물물교환센터에서 일하며 한 블록 떨어져 당당히 버티고 서 있던 D백화점 북지점을 모델로 이 작품을 쓴다.

 

1

 

살아 있다는 까닭 외에 생업이라는 수식어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인지.

밀대와 빗자루가 작은 내 생활의 가게를 쓸고 있을 때

쳐들어 오는 것이다. 허벅지에 꿀을 가득 묻힌 벌떼같이

낮게 웅웅거리며 황금색 상호로 번뜩이는

왕국의 차들이 오는 것이다. 어디선가 이루어진

거대한 공업으로부터 그러나 철저히 은폐된

공업이 자신 스스로를 판매하기 위해

여섯 대의 차를 나누어 타고 사방의

길 끝에서 길을 끌고 몰려온다. 그렇다 여기 이 도시의 한쪽을

제일 먼저 흔들어 깨우는 것은 태양이 아니라

신선한 우유를 만재한 냉동트럭 밀려드는 상품트럭

그리고 도시를 도시답게 만드는 것 또한

널찍하고 쾌적한 녹지대가 아니라

우뚝우뚝 솟아오른 현대식 상가인 것이다.

 

2

 

거대한 벌집을 연상케 한다. 그것은

여왕벌이 충실한 일벌을 거느리는 것같이

물론 천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교육에 의해 훈련받는다는 그 점이 다르겠지만

어쨌든 백화점은 충실한 일벌을 거느린다.

하얀 와이셔츠와 멋있는 넥타이를 매고서

라면상자를 공중으로 던지고 맵시있게 받아 재는

그들. 정오에서 세시까지 사십 명씩 교대로

점심시간을 갖는 드러난 다리의 여점원들

여 점원들에 대해서라면 몇가지 부기할 것이 있다.

기사식당에서 나는 늘 그녀들의 일부를 만나곤 했지

마른 빵을 우겨 넣으며 간단히 점심식사를 때우던

한가한 잡담도 없이 만화책과 주간지를 뒤적이며 나른한 옷주름을 펴던

백색의 처녀들.

선지국밥 속에 숟가락을 묻은 채 나는

그녀들 중의 한 사람에게 얼마나 말을 걸고 싶어했는가

왕국의 여자를 아는 것은 왕국을 아는 것이기에

아니, 내가 왕국을 정복할 수도 있는 일!

그녀들이 좋아하는 이상적 남성을 나에게서 이루고

그녀들의 잠버릇을 충분히 연구한 연후에

시도한다면 그 또한 가능한 노릇. 그녀의 성감대는

주식시세처럼 민감하게 떨려오겠지

그러나 그들이 무엇을 권리로 가지고 있습니까, 그 왕국에 대하여?

물으신다면. 담당매장만이 나의 것이라고 말하겠어요

열 시간의 노동만이 나의 것이라고 말하겠어요

빳빳한 월급봉투만이 나의 것이라고 말하게에엣써요. 말하

게에에, 개처럼 짖게엣써요. 짖게에엣써요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게에엣, 써어요.

그러면 생각해보는 것이다

잘 썰어 놓은 깍두기 한 점을 집어 삼키며

노동은 인간적이다 아니다 비인간적이다

다시 깍두기 한 점을 삼키고서 아니다 아니다

노동은 비인간적인간적 행위다.

아아 모르겠다. 어이 알리

중졸인 내가 어이 알리? 모르겠다, 말해다오.

학문에 도통한 자여, 잠시

딱딱하게 빛나는 해골의 턱주가리를 열어

명확하고 간략하게 누구나 알아듣기 쉽게 말해다오

인간이 노동을 통해서만 행복을 얻을 수 있음은 어인 변괴뇨?

 

3

 

이 왕국엔 보안이 없다. 오고 싶은 자는 오라지

당신 어깨 두드리며 아마 그는 이렇게 속삭일걸

우리 친구가 되지,

어때?

난 네 것이라구!

그의 어깨 두들겨주기엔 당신 키가 모자라겠지만

번뜩이는 네온의 월계관을 쓴

왕관 없는 현대의 왕

그는 결코 지배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두는 것이 좋다

누가 우리에게 채소를 심게 하고

가구를 만들게 하며 어린 누이를

밤새도록 컨베이어 시스템 앞에 꼰아 박아두는지

다가올 할인판매를 광고하고 잽싸게 뒤돌아서서

새로운 판매전략에 고심하는 이자가 바로

우리들의 등과 배를 간지르며

만들라! 만들라! 만들라!

강요하는 것. 기실은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비밀스런 공업이

모두 우리들의 일인 것이다.

 

4

 

사람들이 모여서 강하고 지혜 있는

새로운 왕국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그것은 백화점 왕국이고

오전부터 술 취한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생업을 망친 자들인데

망쳐버렸다구, 풀이 죽어 망. 쳐.

버. 렸. 다. 구. 떠드는 사람들은

정말 생을 망쳐버린 자들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한켠에서 그들의 아내는

얼마나 심약하고 슬프게 지껄이는 것인가

젖통에 남은 젖을 아이에게 먹일 힘도 없이 슬프게

우리도 문을 닫아야겠어요. 우리는, 문을 닫아야겠어요

우리가, 문을 닫아야겠어요 우리의, 문을 닫아야겠어요

우우. 우우우. 우우우우. 우우.

우우우. 우우우우. 우우. 우우.

 

사람들이 모여서 강하고 지혜 있는

상심의 왕국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그것은 백화점 왕국이고

그것은 백인과 황인종간의, 공공연한 성기 핥아주기 계약에 의해

그것은 흑인과 백인간의, 한밤의 매질하기 놀이에 의해

그것은 황인종과 흑인간의, 서로의 어머니 바꾸기 운동에 의해 일어나는

다국적 사람 망치기 왕국이고

그것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 튀어 나와

치사스레 전세계를 먹어 치우는 쓸쓸한 눈뭉치.

 

5

 

백화점을 다스리는 자가 필시

국방을 다스리게 되리라.

 

햄버거에 대한 명상, 민음사, 1987

 

 


 

 

장정일 시인 / 벽돌이 올라가다

 

 

우리들은 얼마나 오랫동안 동네 어귀의 빈터를 이야기 했나

양지바른 그 땅이 푸줏간 남씨의 소유라고

혹은 소문난 바람둥이 곽씨의 땅일 것이라고

지난 봄과 여름, 우리는 상상할 수 있는 온갖 소문을

그곳에 세웠지. 술주정꾼은 맥주홀을

병든 자들은 자혜병원을 세우는 식으로

그런데 저자들은 누구인가.

검은 양피의 두터운 책을 받쳐들고

둥그러니 둘러선 채 …감사…은총…돌보심을

뇌까리는 저들은?

 

죄 많은 동네에 하나님이 집을 짓는다

찬송 없이 여태껏 잘 살아온 이 마을에

주의 충실한 종들이 몰려와 성당을 짓는다

간단한 시축미사가 끝나고

인부들이 땅을 파기 시작한다. 그런데 저들은

하나님을 지하실에 묻으려는군

구경꾼 몰래 지구가 익혀 놓은 금을 캐려는 듯

인부들은 며칠내 땅을 파 내려가고

기초를 놓는다는 말인가

하나님도 자기 집을 땅 위에 굳건히 세워 놓기 위해서는

쌓기 전에 먼저 깊이 파야 한다는 것인가?

 

주의 종들이, 그지없이 선량한 천국의 백성들이

죄 많은 동네에 성당을 짓는다.

적벽돌의 환한 이마에 시커먼 양회를 발라

한 칸 한 칸 신의 별장을 쌓아 올린다.

마치 주스를 마시는 것처럼

정말 저 높은 곳에 어떤 자가 있어 스트로우를 꽂고

벽돌을 빨아 올리는 것일까. 돌아보기가 무섭게

성당은 새로운 면모를 드러내고

저녁이면 그 길고 무거운 그림자가

입맞춤 청하듯 이방인의 창문까지 늘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얼마나 높이 솟구쳤는가

모든 눈썹의 높이를 범람한 붉은 벽돌은

올라가고 올라갔다.

혹 저놈 혼자 신을 만나고 있지나 않을까.

꿈속에도 깨어나 몰래 창문을 열면

그렇기나 한 듯 은은한 구름이 미완의 종루를 감추고

정오마다 새로운 벽돌이 짧은 발꿈치를 들었다.

벽돌이 올라간다, 벽돌이!

높아지는 종루를 바라보며 사람들은 이

비천한 마을에 천국으로 가는 계단이 서는 줄 알았지만

그 높이 멈춘 쯤해서 십자가 하나 눌러 앉을 뿐

 

쏟아지는 햇살 가운데 하얀 십자가 하나

오롯이 세워질 때 나는 생각했다.

신은 하늘에 있고 벽돌이 아무리 높아진들

육체는 지상에서 견디는 것

우리 마음이 성당으로 가든, 불당으로 향하든

굴리는 대로 구르는 흔들바위를 숭배하든

필시 믿음이란 것도 쌓고 쌓아

마지막엔 자기 가슴 속에 한줌 소금을

남기는 일일 것이라고

 

햄버거에 대한 명상, 민음사, 1987

 

 


 

 

장정일(시인, 소설가)

1962년 경북 달성에서 출생. 성서중학교를 졸업. 1984년 무크지 《언어의 세계》3집에 〈강정간다〉 외 4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 198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실내극〉 당선. 같은 해인 1987년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으로 최연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 1990년 『아담이 눈뜰 때』를 내면서 소설가로 전업. 시, 소설, 희곡, 시나리오 등 모든 장르의 글이 영화화되고 연극 무대에 올려지면서 우리 문화계에 '장정일 신드롬'을 일으킨 혁신적 작가. 대표작으로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길안에서의 택시잡기』, 희곡집 『긴 여행』, 장편소설 『너에게 나를 보낸다』,『너희가 재즈를 믿느냐』, 『보트하우스』 등이 있으며 최근작으로는『중국에서의 편지』가 있다. 1987년 제7회 최연소의 나이로 김수영문학상 수상. 1997 웹진 산티 기획위원. 2006 동덕여자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