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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지향 시인 / 바람과 바다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7. 5.

김지향 시인 / 바람과 바다

 

 

어젯밤 새도록 바람의 회초리에 매 맞은 바다

아침에 보니 눈꺼풀이 잔뜩 부어올랐다

 

바람은 바다에게 품고있는 잡동사니를 내놓으라며

아침에도 소리 높여 호통을 친다

 

바다는 무엇이든 잘도 삼켜버린다

배속에 넣고 있는

우럭 미역 명태 조개 물지렁이 고래 수달 바다쥐빠귀 불가사리

그들의 어린 것 까지 바다가 삼킨 잡동사니들은 헤일수도 없다

잡동사니도 바다 속에 들어가기만 하면 보물이 되어버린다

 

바람은 때때로 바다에게 보물을 토해내라며

크게 소리치며 바다 몸통을 돌려가며 패대기친다

살이 뜯긴 바다 가슴이 오늘 보니 움집처럼 패였다

 

바다 뼈가 다 들어나도 품고 있는 보물들은 나올 기미가

서푼어치도 안 보인다

 

(잡동사니들은 바다 깊은 가슴 안에서

찰삭찰삭 물장구를 치며 오케스트라를 연주하고 있다)

 

문득 바람 배를 가르며 전조등을 켠 유람선 한 채

발을 멈추고 바다 가슴이 보내주는 오케스트라 연주를

가만히 듣고 있다 바람도 함께 서서 잠잠히 듣다가

신명이 났는지 어깨춤을 추며 크게크게 박수를 보낸다

 

바람은 바다 보물에 쏟은 끈질긴 욕심을 툭, 끊고

유람선을 타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가고 없다

 

가슴을 활짝 열어젖힌 바다는 지금 오케스트라 연주로

한창 뜨겁게 끓고 있다

 

 


 

 

김지향 시인 / 바람을 타고

 

 

그는 이제 문을 나선다

몸의 마디 마다 지퍼를 열어 놓고

바람의 멱살을 휘어잡고 바람 몸 전체를

지퍼 속에 집어넣는다

그의 팔다리는 풍선처럼 살아나 퍼득인다

 

걸어보지 않았던 길들이 모두 목을 쳐들고

인사도 없이 그에게 달려든다

 

인터넷 속에서 한 두 번 만났던 사물들이

저들 끼리 모였다 흩어졌다 그림을 만들며

눈썹 밑으로 지나가고

발자국 소리도 없는 사람들이

낯선 소리를 내며 그림 속으로 스르륵

빨려들어 간다

그림들은 커졌다 작아졌다

푸르다 하얗게 바래지며

지상의 저물녘 들판으로 돌아간다

 

호주머니처럼 열린 입으로 연방

감탄사를 게우며 그는

멈추지 않은 지상의 생을 벗어두고

저물녘의 기차 꼬리짬에서

지나온 길들을 지퍼 속에 집어넣으며

터널 같은 세상 한 바퀴 돌아

지금 마악 궤도 밖으로 사라져 간다.

 

 


 

 

김지향 시인 / 바람의 반란

 

 

바람이 일어선다

나뭇잎이 나부끼는 가지에서 뚝 끊어져

서쪽 하늘 뺨에 걸려 이빨을 갈고

햇살은 동쪽 산 이마에서 발을 옮기지 못한다

 

바람이 일어선다

해가 빛을 잃고 구름 뒤에서 물구나무로 벌을 서고

아까부터 바람이 하늘 밖에 세워둔

비가 슬슬 바람의 눈치를 보며 뛰쳐나와

수직으로 빗금을 그으며

땅에 부딪힌다 몸이 으깨진다

 

바람이 일어선다

땅이 키우는 풀머리가 부러지고

풀머리 밑으로 처박혀 죽은 비로

땅이 지워져 버린다 조금씩 비의 시체에

파먹혀 지워지는 땅을 보는 바람

아직 심장이 멎지 않은 땅에 크게 숨을 불어넣는다

(땅이 없이는 바람의 스펙타클도 허사임을 깨우치고 땅

전체에 엎질러 놓은 반란을 한 장 한 장 걷어내기

로 했음)

 

바람이 일어선다

풀잎과 땅을 움켜쥔 주먹을 풀고

땅의 가슴에 박힌 대못의 상처를 치료 하기로

바람이 마음을 바꿔 먹는다.

 

 

 


 

김지향 시인 / 바람이 돌아온다

 

 

달빛이 허연 뼈를 뽑아들고

길 모퉁이에 비켜 서 있다

흰옷 입은 나무들의 그림자가

밤을 썰어내는 톱질 소리를 내며

구멍 뚫린 공간을 빠져 나간다

시간을 쏠아먹는 좀 벌레가

발소리를 이고 땅 밖을 기어간다

귀가 게우는 개구리 소리를

둑 모가지에 걸어두고

품팔이 갔던 바람이 돌아온다

조용하다

달이 툭, 땅 가득 떨어질 뿐

흰옷 입은 나무들의 눈이 깨져

사방에 흰빛을 뿌릴 뿐

바람이 문빗장을 풀고 들어갈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김지향 시인 / 발끝으로 간다

 

 

사람은 가고 없는 강변 의자에는 눈송이가 몇 앉아

옛날이야기 속으로 가고 있다 눈송이 몇이서 걸어가는

시간의 자국마다 소복소복 모여앉아 여럿이 되고 무리가 되어

입 열린 호주머니에서 옛날이야기를 풀풀 꺼내놓고 앉아있다

 

한참 후엔

의자 혼자 남겨두고 서로 손을 잡은 눈송이가 무리무리

사람의 머리를 올라타고 부지런히 가고 있다 눈이 오는 날은

잠자는 세상이 깰까 봐 시간도 까치발로 뛰어 간다

 

눈을 머리에 얹은 두 세 사람은

팔짱을 끼고 지나간 날의 가슴에서 자고 있는 이야기들을 꺼내어

무겁게 껴입은 이 시대 사건들 위에 겹쳐놓고 구시렁거리며

발끝으로 가다가 무릎으로 가고 있다

 

(사건의 중간 부위에 빠지면 무릎까지 파묻힌 몸을

빼낼 줄도 모르고 점점 깊이 빠져들어 가는 사람들,

그것이 무덤인줄은 빠진 뒤에야 깨닫는다.)

 

 


 

 

김지향 시인 / 발이 달린 사랑

 

 

사랑은 가슴에서 산다

가슴에서 사는 사랑이

베어지지 않는다는 논리는

알맹이가 없음

하고 나는 손을 쳐든다

혼자서 이렇게,

나의 실험대에 올라온 사랑을

현미경으로 뚫어보았다

사랑, 그 자유분방주의자는

거침없이 발은 발대로 손은 손대로

머리는 머리대로

떨어져 서로 반목하며

제 갈 길로 갈

궁리에 빠져있었다

서로 다른 머리 발 손이

한 덩치로 얽혔을 뿐

틈틈이 발은 손, 손은 발을 배어낸다

그렇지, 그날도

한 쪽 발이 베어져 나갔었지

베어낸 자리엔 재빨리 구멍이 들어앉았지

구멍은 자기의 부피를 키우려고

나머지 사랑지체도 내쫓으려 했었지

아암, 그렇고말고

사랑발이 잘려나간 빈 칸을

나는 구멍이 차지하지 말게 하려고

떨며떨며 한 쪽이 기우뚱한 가슴으로

사랑 발을 붙잡아오려고 찾아 나섰지

세상 아무데서나 볼 수 있는 사건 사이

어둠 사이 시기 질투 분쟁 사이

어디에 내 사랑의 발은 걷고 있나

일곱 번씩 일흔 번도 용서해주며

사랑발이 제 맘대로 잘려나간

무례를 용서해 주며

아, 일곱 번 째 용서함

바로 그 때였다

나의 사랑 발은

세상 구석 어느 개골창에 빠져

어둠 그것이 되어 있었다

발톱 한 귀퉁이에도 제 모습이

남아있지 않게,

나는 이 사실을

사랑은 베어지지 않는다는

이 엄청난 오류를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사랑 발을 집어 들고 사람들 속에서

사람들에게 소리 질렀다

돌아다 본 사람들은

그게 이전부터

어둠이라고 우겨댔다

내 가슴에서 배어져나간

사랑의 발임을 믿지 않는 동안

실은 그게 나도 모르게

어둠이 되어버린 나의 발임을

사람들이 어둠을 보지 않고

나를 보며 웃는 이유를

나는 비로소 알아채고 소스라쳤다

얇은 바람 이빨에도

삭둑삭둑 잘려지는 보드라운 잎사귀

사랑아,

집을 나가면 지나온 길을 잊어버리는

그러므로 되돌아 올 줄도 모르는

눈썰미 없는 사랑아~

하고 나는 골목어귀에서

지는 해를 붙잡고

찾아낸 사랑의 발을

그 어둠을 씼는다

 

 


 

김지향(佑堂 金芝鄕) 시인

1938년에 일본 규수에서 출생. 그후 경상남도 김해와 양산에 정착하여 성장. 6.25후 홍익대학교 국어국문학를 졸업, 단국대에서 문학석사와 서울여자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 시집「병실」「막간풍경」「사육제」등 25권과 시선집「살아서 노래하는 강물」「바람이 돌아온다」「김지향 99선」「김지향 시선집」, 에세이집「바람과 연기」외 다수, 시론집「한국현대여성시인연구」외 학술 논문 20여편과 화갑기념문집「내일에게 주는 안부」, 50년 기념문집「김지향의 시세계」「나뭇잎이 시를 쓴다」등 많은 저서를 펴냄. 단국대, 홍익대, 한세대 등에서 국문학을 가르쳤고 한양여대 문창과 교수. 시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박인환문학상, 윤동주문학상, 한국시인정신상, 한국민족문학대상 등 많은 문학상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