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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연배 시인 / 비문을 뜨다
이끼 낀 돌기둥 한가운데 박혀 묵묵히 의미를 지켜온 문자들 세월이 흘러도 세긴 뜻은 꼿꼿한데 행간을 읽는 나그네 눈빛 자못 숙연하다. 천금의 맹세도 지금에 와서는 한낱 조롱거리일 뿐인 세상 인심 앞에서 닳고 깎인 글자들이 울음을 운다. 목숨보다 중히 여긴 정조도 죽음으로 지켜낸 명분도 바람의 흔적만 남긴 채 돌문에 갇혀 풍화되어 가는 어처구니. 바위에 금을 긋는 무심한 세월을 먹지로 떠놓고 손 짚어가며 읽고 또 읽느니 비바람에 녹슬지 않는 마음의 획 하나 붙잡아 두고 싶은 까닭이다.
구연배 시인 / 사랑 1
사랑은 그 사람의 눈빛에 흐려진 마음을 닦는 일입니다.
마주하면 보는 모든 것이 새롭고 생각하는 것마다 깨끗해지는 당신의 눈빛
사람들은 눈멀었다고 말을 하지만 나는 그대 안에서 행복합니다.
고백하거니와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꼿꼿해질 수 있는 것은 그대를 바라보며 매일매일 약시의 마음을 씻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그 사람의 눈빛에 흐린 마음을 닦는 것
그리하여 나는 말마다 환해집니다.
구연배 시인 / 사랑 2
당신의 눈동자 속에 나를 던져놓고 고요히 마음 적시는 뜻은 그리움으로 살고 싶어서
내 가슴 속에 그리움 다져놓고 뜨겁게 마음 태우는 뜻은 사랑으로 살고 싶어서
그리움 아니면 서러울 목숨 사랑이 아니면 재가 되는 삶
목숨을 걸어놓고 꿈엔들 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뜻은 영원히 함께 살고 싶어서.
구연배 시인 / 산딸기꽃
단박에 눈멀었대도 너무 많은 것을 가르쳐주려고 애쓰지 말아요 미열을 앓으며 한 번에 하나씩 사랑을 배울래요 그래서 알게된 간절함일랑 빨갛게 익혀가며 오래오래 당신을 제 곁에 머물게 하고 싶어요 당신의 사랑을 한목에 다 알고 싶지 않아요 종종 상처를 준다는 것 알아요 잘 길들여지지도 않아요 종종 상처를 준다는 것 알아요 잘 길들여지지도 않고요 하지만 기대치를 낮추고 지켜봐 주세요 당신 곁을 지키는 억센 가시울타리가 될게요
구연배 시인 / 산에 들다
불어나는 것은 강물이 아니라 초록이었다. 반짝이는 것은 잎이 아니라 녹음이었다. 흐르는 강물처럼 골골의 이름 없는 마을을 감싸고 꿈틀대는 산맥 굽이쳐 살아있음을 알리고 때때로 울음 우는 것은 여울이 아니라 나무들이었다. 떼 지어 숲을 헤엄치는 새들과 물결치는 무수한 야생초들 쪽배를 타고 물이랑을 일구는 어부들처럼 산 살림은 누가 누구를 거느리지 않는 등 푸른 살림이다. 그렇다. 강이 흘러서 바다에 이른다면 산은 흘러서 하늘에 닿는다. 오늘도 나는 마음의 낚싯대를 끌고 산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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