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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고재종 시인 / 누님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7. 5.

고재종 시인 / 누님

 

 

저것 좀 보아 저 아가씨

봉선화 따서 손톱 묶네

저 아가씨 얼굴 좀 보아

홍색 자색 연분홍 드네

가슴 봉긋한 저 아가씨

꽃물 든 손 가슴에 얹네

저 먼 데로 까치발 딛네

말만한 엉덩이 저 아가씨

어쩌자고 저 아가씨

바알갛게 달아오르네

숨쉬기조차 힘들어 하네

아아, 저 아가씨 눈이슬짓네

내사 차마는 못 보겠네

진저리치다 깨어나니

울 밑의 봉선화 비에 젖네

 

 


 

 

고재종 시인 / 눈물을 위하여

 

 

저 오월 맑은 햇살 속

강변의 미루나무로 서고 싶다

미풍 한자락에도 연초록 이파리들

반짝반짝, 한량없는 물살로 파닥이며

저렇듯 굽이굽이, 제 세월의 피로 흐르는

강물에 기인 그림자 드리우고 싶다

그러다 그대 이윽고 강둑에 우뚝 나서

윤기 흐르는 머리칼 치렁치렁 날리며

저 강물 끝으로 고개 드는 그대의

두 눈 가득 살아 글썽이는

그 무슨 슬픔 그 무슨 아름다움을 위해서면

그대의 묵묵한 배경이 되어도 좋다

그대의 등 뒤로 돌아가 가만히 서서

나 또한 강끝 저 멀리로 눈 드는

멀쑥한 뼈의 미루나무나 되고 싶다

 

 


 

 

고재종 시인 / 달밤에 숨어

 

 

외로운 자는 소리에 민감하다.

저 미끈한 능선 위의

쟁명한 달이 불러 강변에 서니,

강물 속의 잉어 한 마리도

쑤욱 치솟아 오르며

갈대 숲 위로 은방울들 튀기는가.

난 나도 몰래 한숨 터지고,

그 갈대 숲에 자던 개개비 떼는

화다닥 놀라 또 저리 튀면

풀섶의 풀 끝마다에

이슬농사를 한 태산씩이나 짓던

풀여치들이 뚝, 그치고

난 나도 차마 숨죽이다간

풀여치들도 내 외진 서러움도

다시금 자지러진다.

그 소리에 또또 저 물싸린가 여뀌꽃인가

수천 수만 눈뜨는 것이니

보라, 외로운 것들 서로를 이끌면

강물도 더는 못 참고 서걱서걱

온갖 보석을 체질해대곤

난 나도 무엇도 마냥 젖어선

이렇게는 못 견디는 밤,

외로운 것들 외로움을 일 삼아

저마다 보름달 하나씩 껴안고

생생생생 발광하며

아, 씨알을 익히고 익히며

저마다 제 능선을 넘고 넘는가.

외로운 자는 제 무명의 빛으로

혹간은 우주의 쓸쓸함을 빛내리.

 

 


 

 

고재종 시인 / 대설

 

 

밖에는

눈 퍼붓는데

눈 퍼붓는데

 

주막집 난로엔

생목이 타는 것이다

난로 뚜껑 위엔

술국이 끓는 것이다

 

밖에는

눈 퍼붓는데

눈 퍼붓는데

 

괜히 서럽고

괜히 그리워

뜨건 소주 한 잔

날래 꺽는 것이다

또 한잔 꺽는 것이다

 

세상잡사 하루쯤

저만큼 밀어두고

 

나는 시방

눈 맞고 싶은 것이다

너 보고 싶은 것이다

 

 


 

 

고재종 시인 / 면면함에 대하여

 

 

너 들어 보았니

저 동구밖 느티나무의

푸르른 울음소리

 

날이면 날마다 삭풍 되게는 치고

우듬지 끝에 별 하나 매달지 못하던

지난 겨울

온몸 상처투성이인 저 나무

제 상처마다에서 뽑아내던

푸르른 울음소리

 

너 들어 보았니

다 청산하고 떠나버리는 마을에

잔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그래도 지킬 것은 지켜야 한다고

소리 죽여 흐느끼던 소리

가지 팽팽히 후리던 소리

 

오늘은 그 푸르른 울음

모두 이파리 이파리에 내주어

저렇게 생생한 초록의 광휘를

저렇게 생생히 내뿜는데

 

앞들에서 모를 내다

허리 펴는 사람들

왜 저 나무 한참씩이나 쳐다보겠니

어디선가 북소리는

왜 둥둥둥둥 울려나겠니

 

 


 

고재종(高在鐘, 1957~ ) 시인

1957년 전남 담양에서 출생. 담양농업고등학교 졸업. 1984년 실천문학사의 신작시집 <시여 무기여>에 시 <동구밖집 열두 식구>를 발표하며 등단. 시집으로 <새벽 들><사람의 등불><앞강도 야위는 이 그리움> <바람 부는 솔숲에 사랑은 머물고>, <쪽빛 문장> 등이 있고, 수필집에 <사람의 길은 하늘에 닿는다>가 있다. 제16회 소월시문학상 대상을 수상. 제11회 신동엽 창작기금 받음. 민족문화작가회의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