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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종 시인 / 누님
저것 좀 보아 저 아가씨 봉선화 따서 손톱 묶네 저 아가씨 얼굴 좀 보아 홍색 자색 연분홍 드네 가슴 봉긋한 저 아가씨 꽃물 든 손 가슴에 얹네 저 먼 데로 까치발 딛네 말만한 엉덩이 저 아가씨 어쩌자고 저 아가씨 바알갛게 달아오르네 숨쉬기조차 힘들어 하네 아아, 저 아가씨 눈이슬짓네 내사 차마는 못 보겠네 진저리치다 깨어나니 울 밑의 봉선화 비에 젖네
고재종 시인 / 눈물을 위하여
저 오월 맑은 햇살 속 강변의 미루나무로 서고 싶다 미풍 한자락에도 연초록 이파리들 반짝반짝, 한량없는 물살로 파닥이며 저렇듯 굽이굽이, 제 세월의 피로 흐르는 강물에 기인 그림자 드리우고 싶다 그러다 그대 이윽고 강둑에 우뚝 나서 윤기 흐르는 머리칼 치렁치렁 날리며 저 강물 끝으로 고개 드는 그대의 두 눈 가득 살아 글썽이는 그 무슨 슬픔 그 무슨 아름다움을 위해서면 그대의 묵묵한 배경이 되어도 좋다 그대의 등 뒤로 돌아가 가만히 서서 나 또한 강끝 저 멀리로 눈 드는 멀쑥한 뼈의 미루나무나 되고 싶다
고재종 시인 / 달밤에 숨어
외로운 자는 소리에 민감하다. 저 미끈한 능선 위의 쟁명한 달이 불러 강변에 서니, 강물 속의 잉어 한 마리도 쑤욱 치솟아 오르며 갈대 숲 위로 은방울들 튀기는가. 난 나도 몰래 한숨 터지고, 그 갈대 숲에 자던 개개비 떼는 화다닥 놀라 또 저리 튀면 풀섶의 풀 끝마다에 이슬농사를 한 태산씩이나 짓던 풀여치들이 뚝, 그치고 난 나도 차마 숨죽이다간 풀여치들도 내 외진 서러움도 다시금 자지러진다. 그 소리에 또또 저 물싸린가 여뀌꽃인가 수천 수만 눈뜨는 것이니 보라, 외로운 것들 서로를 이끌면 강물도 더는 못 참고 서걱서걱 온갖 보석을 체질해대곤 난 나도 무엇도 마냥 젖어선 이렇게는 못 견디는 밤, 외로운 것들 외로움을 일 삼아 저마다 보름달 하나씩 껴안고 생생생생 발광하며 아, 씨알을 익히고 익히며 저마다 제 능선을 넘고 넘는가. 외로운 자는 제 무명의 빛으로 혹간은 우주의 쓸쓸함을 빛내리.
고재종 시인 / 대설
밖에는 눈 퍼붓는데 눈 퍼붓는데
주막집 난로엔 생목이 타는 것이다 난로 뚜껑 위엔 술국이 끓는 것이다
밖에는 눈 퍼붓는데 눈 퍼붓는데
괜히 서럽고 괜히 그리워 뜨건 소주 한 잔 날래 꺽는 것이다 또 한잔 꺽는 것이다
세상잡사 하루쯤 저만큼 밀어두고
나는 시방 눈 맞고 싶은 것이다 너 보고 싶은 것이다
고재종 시인 / 면면함에 대하여
너 들어 보았니 저 동구밖 느티나무의 푸르른 울음소리
날이면 날마다 삭풍 되게는 치고 우듬지 끝에 별 하나 매달지 못하던 지난 겨울 온몸 상처투성이인 저 나무 제 상처마다에서 뽑아내던 푸르른 울음소리
너 들어 보았니 다 청산하고 떠나버리는 마을에 잔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그래도 지킬 것은 지켜야 한다고 소리 죽여 흐느끼던 소리 가지 팽팽히 후리던 소리
오늘은 그 푸르른 울음 모두 이파리 이파리에 내주어 저렇게 생생한 초록의 광휘를 저렇게 생생히 내뿜는데
앞들에서 모를 내다 허리 펴는 사람들 왜 저 나무 한참씩이나 쳐다보겠니 어디선가 북소리는 왜 둥둥둥둥 울려나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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