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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향 시인 / 봄을 낳는 나무들
후미진 골짜기 흰 보선 신은 채 볼록볼록 배를 안고 기도하는 나무들
남녘땅 익은 바람이 건너와 톡, 톡, 건드릴 때 마다 꽃송이 하나씩 낳는다
아프고도 괴로운 겨울을 만석의 몸으로 버티더니 아직도 머리엔 흰 비녀 꽂은 채 줄줄이 꽃송이 낳기 바쁜 나무들
(산기슭마다 나무들의 아픔이 빨갛게 피었네)
저 터진 꽃송이에서 우리는 깨어있는 삶을 꺼내보며 가슴에 햇덩이 하나씩 품어 꽃송이의 삶에게 열기를 보낸다
후미진 골짜기 산꿩이 홰를 치며 목청을 뽑는 긴 봄날 창 열고 내다보면 아직은 맵싸한 산이마 절반은 안개에 싸여있네
김지향 시인 / 봄이 나를 읽는다
누군가 세상 버티칼을 열어제친다
봄이 아장 아장 걸어온다 나무도 없는 빌딩 꼭지에 만지면 사그라질 황금빛이 쿡, 주저앉는다 황금빛 속에 가라앉은 빌딩이 얼뜨기 내 눈을 읽는다
누군가 평퍼줌하게 눕혀 놓은 평지에 발을 넣고 있는 나무들이 돌돌 말린 들판을 쫘악 펴 놓고 호주머니에서 꺼낸 노랑물감을 군데군데 뿌리는 중이다
버스에서 뛰어내린 바람 한 소절이 방금 나온 개나리 목을 뽑아내 온 들판에 노란 바다를 깔아놓는다 촐랑촐랑 노랑물의 항아리들이 내 눈을 읽는다
누군가 불을 낸 하늘 기슭 불긋불긋 몸 태운 조개구름이 천천히 걸어가다 잠깐 멈추어 입 다문 채 할 말이 많은 내 눈을 멍청히 읽는
개나리 목이 창안을 기웃거리다 푹 빠진 모니터 폴더 속에 숨었다 나왔다 하며 언 몸을 풀어내는 키보드 커서가 내 눈에 담긴 개나리 말을 읽는다
누군가 이끌고 가는 병정놀이 행진처럼 발소리 맞추어 가다 서다 하는 자판기가 말이 쏟아져 나올 것 같은 내 눈을 읽는다 이제 내 눈은 기계음도 바람소리도 아닌 합성음의 추상어로 아지랑이 같은 감탄사를 마구 뿜어내고 있다
김지향 시인 / 불 길 끝에서 일어나는
땅을 덮고 있는 한 장의 죽음을 걷어내고 나면 땅껍질을 떠밀고 나오는 새파란 불 도깨비 불처럼 사방팔방 옮겨붙기 바쁘다
밧줄에 묶여 얼음이된 목선도 갯버들 언 손에 잡혀 먼지가 된 꿈도 지워진 둑길에 떨어져 돌이된 별무리도 봄 불에 모오두우 몸 풀려 달리는 말 갈기가 되었다
세상 곳곳에서 꼼지락거리며 일어나는 빛 한 모금 오랜 기다림으로 목마른 사람들의 폐혈관을 열고 미끄러져 내려간다 온 몸에 빛살이 뛰어가는 봄 새파랗게 잎이 돋은 사람들의 눈에서 줄줄이 꽃이 태어난다 속살을 열고 어지럽게 터져나온 꽃불이 웅크리고 자는 거리를 깨운다 오늘은 꽃의 꽁무니에 무단가출 꼬리표가 붙지 않았다
땅은 온통 빛도가니 하늘 마저 내려와 불을 질렀다 눈싸움을 벌였던 어제의 적의는 깡그리 잊어버리고.
김지향 시인 / 불면증
밤새 길이 혼자 길을 걷는다 길을 신고 가던 발을 내려놓은 밤엔 불빛만 태우고 길이 혼자 걷는다 한참 걷다보면 옆구리에서 자꾸 찢겨나가는 길이 또 길을 신고 혼자 걷는다
길이 길을 이고 걷는다 길 위의 길로 또 길이 혼자 걷는다 깊은 밤엔 어둠만 태우고 하늘을 신고 길이 걷는다
머리 위엔 어둠을 걷어내는 빛이 꽃 덤불을 이룬 봉화들이 길이 되고 있는 하늘 밖의 길 밖의 길로 길이 혼자 끝도 없이 걷는다
김지향 시인 / 비 온 뒤 풀밭
시간들이 나를 팽개치고 앞질러 가더니 뜰 앞 풀뿌리를 키웠나 봐 비 온 뒤 창문을 열고 보니 뜰 앞이 새파래졌다 시간이 풀의 세포 속에 스며들면 풀잎의 키도 시간처럼 빨리 자라나 봐
비 온 뒤 봄 아침 풀밭이 잘 닦은 거울이 되었다 거울이 되어 사람의 가슴도 비춘다 그러므로 풀밭에서는 사람의 속도 투명해진다
아직 아무 발자국도(시간의 발자국말고는) 지나가지 않은 풀의 가슴에 사람 가슴의 흙탕물이 튕겨갈까봐 바라보기가 미안하다
비가 이제 그만 짓밟았으면 싶다 풀의 눈물이 될까 봐 마음 아리므로.
김지향 시인 / 비 사이로 찾아가는
어제와 내일 사이엔 얼어붙은 비가 빡빡하게 들어서 있다 공간을 붙들고 서 있는 비 사이로 바스러진 시간들을 홈질해 본다 듬성듬성 기워진 시간들이 흘러가는 스크린을 올라탄다 스크린 앞머리에 칩을 꽂아본다
타박머리 아이들이 냇가에서 물장구를 친다 윗마을 운동장에선 덜 핀 해바라기들이 재기차기를 한다 풍금소리가 들고 있는 아랫마을 예배당에선 날개옷 속에서 장다리꽃들이 손을 모으고 있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들녘에선 출렁이는 풍선꼬리를 따라 빳빳한 다리의 개나리들이 달리기를 한다
비를 걷어내면 환히 떠오르는 눈 시린 풍경들 너머 풀려있는 스크린 끝 짬에 칩을 꽂아본다 수직으로 얼어붙은 비를 부수고 힘차게 치솟는 비행접시 한 채씩 연이어 열리고 있는 내일 안에 까까머리들을 태우고 짙푸른 우주 속으로 잠적해간다
어제와 내일은 멀고 먼 끝과 끝이지만 실 티 같은 시간의 칩이 촘촘히 이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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