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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종 시인 / 이승 꽃의 향기에 저승 새가 취하면
고산의 석남화라 했지요. 네가 석남화 머리에 꽂고 죽으면 나도 석남화 머리에 꽂고 죽는소리에 너와나와가 함께 깨어난다고 했지요. 백두산 골짝 암벽에 피는 꽃, 노랑만병초라고도 하는데요. 그 향기가 하도나 좋아선, 네 오랜 체증도 내 밭은 정기도 새삼새삼 씻는다는데요. 그것이 광대고원을 달리는 바람 향이거나 그것이 감사나운 강풍이 잠깐 비낀 날, 아청빛 하늘의 흰구름 향이거나 그것이 구름 저편에 아스라히 묻힌 시간 밖의 시간을 일깨우는 은하 향이어서 그래요, 석남화 향기 맡으면 妙音鳥라던가 그런 새가 울 것 같아요. 극락정토 설산에 살아서 너무도 춤 잘 추고 너무도 미음을 내어선 네가 병들고 내가 죽을지라도 왜 아니 싱싱하고 왜 아니 생생하도록 그렇게 그렇게 새가 울고 말겠지요. 그러면 석남화주, 내 마시고 너도 마시고 한 오십년 더 우는 거예요, 그 눈물로 꽃향기와 새 노래 듣는 꿈길을 너와나와는 조금은 닦을 수가 있어서 두발부리 두억시니와 같은 세상의 서러운 사랑들 먼저 걷게 할 테지요.
고재종 시인 / 정자나무 그늘 아래
느티나무 수만 이파리들이 손사래 치는 느티나무 그늘 소쇄한 정자에 애진 마음이 다 되어 앉아본 적이 있느냐. 물색 푸른 앞들은 가멸지고, 나는 오늘도 정자에 나와선 멍석몰이쯤 당한 삭신이라도 바람의 아홉새베에 씻고 씻어보는 것이다. 느티나무 그늘 암암할수록 그늘 밖의 세상은 아연 환해지는 느티나무 그늘에 너와라도 함께인 듯 앉아, 저 느티나무의 어처구니 둥치와 둥치에 새겨진 세월의 鱗片을 생각하면 오목가슴이 꽉 메여오기도 하는데, 나는 내 사소한 날의 우련 우련 치미는 서러움만 매미 떼의 곡지통에 실어보는 것이다. 이제는 찾는 이도 몇 안 되는 정자에 시방 몇몇의 고랑진 허드레 얼굴들, 그 흙빛 들수록 앞들은 점점 푸르러지는 느티나무 그늘 생생한 정자에서 어제는 하염없던 쑥국새 울음을 듣고 시방은 치자향 아득한 것도 맡아보는데, 딴엔 꽃과 새의 視聽 너머에 더 간절한 바도 있는 것이다. 가령 이 느티나무 둥치 부여안고 흰 달밤, 어느 여인이 목놓아 울고 이 느티나무 둥치 찍어대며 웬 봉두난발이 발분했던가 하는 것들인데, 너는 언젠가 추억되는 것의 아름다움 혹은 슬픔이라고 했던가. 나는 내친김에 실낱 줄기 못 끊는 저 냇물과 그 냇가의 새까만 벌때추니 떼며 겨울이면 마을의 그만그만한 집들과 나뭇가지 끝마다 열리는 별 떼랑 하냥 난장을 트던 것도 되새김하다간, 그 은성했던 육두문자와 파안대소와도 참 서느럽게는 등을 돌린 정자에 앉아 오늘은 다만 성성한 노동과 오늘은 다만 뜨거운 사랑과 휴식의 오늘의 생생한 나라를 묻고 묻는 것이다. 오늘도 간간 쑥국새 울음은 깃들어선 이렇게 두 눈 그렁그렁하게는 흰 구름 저편까지를 바라보게 하는데 그러면 저기, 저 生은 또 어쩌려고 뭉실뭉실 이는 수국화처럼 환한 그늘로 차오르고, 이쯤이면 나도 그만 애진 마음이 다 되어 부쩌지 못하는 걸 너도 알겠느냐. 그러다가도 상처투성이의 느티나무와 그 상처마다에서 끈덕지게는 뽑아내는 푸른 잎새를 헤다보면 그 잎새 하나로 默默靑靑 남은 일도 너무 서러워지지는 않겠다 싶은 날,
고재종 시인 / 즐거운 경배
나는 가난해서 면서기의 권세도 없이 냉이, 패랭이, 감국, 바람꽃 그 여린 숨탄것들 앞에 무릎을 꿇는다
이유는 꽃들에게 가서 물으라 다만 그 애젖함에 목이 메리라
고재종 시인 / 천지간의 네 속삭임
나, 무엇을 차마 기다리지 않았지만 무어라 무어라, 종일 속삭이는 저 봄비 아득한 숨결은 돌아와 이제 마악 옴짓거리는 살구나무의 어린 꽃망울엔 무슨 구슬이 엉기는지 와르르 무너지는 해동의 담 너머 앞들 메말라터진 보리밭엔 무슨 꿈들이 파릇파릇해지는지 고요하여라, 다만 천지가 속삭이며 서로를 한없이 달래는 소리뿐 나, 무엇을 차마 기다리지 않았지만 그 오랜 지글거림도, 그 지글거림의 내 영혼 속 쓸쓸한 적막산천도 이제는 깨어나 봄비 머금는 시간, 동구밖 당산나무 둥치는 왜 그렇게 부르르 떨어대는지 거기 때까치는 젖어드는 날개를 접고 왠 생각에 골똘히 잠겼는지 나, 무엇을 차마 기다리지 않았지만 내가 그저 살아낸 모든 상처들이 저 봄비 융융한 숨결로 넘쳐나 十方이 촉촉히 젖어든다면 세상 모든 죽은 것들의 흙은 산 것들의 새싹들을 속속 틔우는지 아니 이 고요의 밀림 속, 무엇 하나 속삭이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봄비는 내 생의 작은 뜰을 꽤는 적셔볼 참인지
고재종 시인 / 첫사람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꽃 한번 피우려고 눈은 얼마나 많은 도전을 멈추지 않았으랴
싸그락 싸그락 두드려보았겠지 난분분 난분분 춤추었겠지 미끄러지고 미끄러지길 수백 번
바람 한 자락 불면 휙 날아갈 사랑을 위하여 햇솜 같은 마음을 다 퍼부어 준 다음에야 마침내 피워낸 저 황홀 보아라
봄이면 가지는 그 한 번 덴 자리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상처를 터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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