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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홍사성 시인 / 호천망극 외 8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5. 16.

홍사성 시인 / 호천망극

 

 

지친보다 가깝던 사형님이 입적했다

 

회자정리라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나

 

거짓말 할 곳 없는 게 가장 허전하다

 

 


 

 

홍사성 시인 / 고마운 아침

 

 

아침마다 주름 얼굴

무덤덤 바라보며

마주 앉아 밥 먹고

빈말도 섞으며 사네

 

이보다 더 고마운 일 세상 어디에 있는가

 

 


 

 

홍사성 시인 / 쿠무타거 모래언덕

-실크로드 시편 18

 

 

발목이 푹푹 빠져 걸을 수가 없었다

 

올라가려 할수록 자꾸만 미끄러졌다

 

지금껏 걸어온 길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홍사성 시인 / 윤창화

 

 

불교출판 30년 넘게 한 내 친구 윤창화

나이 들수록 목소리 그윽해져

오대산 상원사 범종 소리 듣는 것 같다

 

누구는 그가 아침저녁

범종 소리 듣고 자라서 그렇다고 하지만

보면 볼수록 그게 아니다

 

천 년 범종 소리보다 더 오래가는 종소리

세상에 그런 게 있다면 그걸 하겠다며

오로지 책 만드는 일만 한 탓이다

 

깊은 밤 눈감고 있으면

오대산 솔바람까지 한 보따리 풀어놓고

귀나 맑히자고 씨익 웃는 내 친구 윤창화

 

 


 

 

홍사성 시인 / 연신내 시장

 

 

각자에게 허락된 점포는

세평 남짓

 

여기에 목숨 걸고 평생을 살아간다

 

하루도

쉬는 날 없이

 

순대 속 비벼 넣으며

 

계간 『시조시학』2019년 가을호에서

 

 


 

 

홍사성 시인 / 내년에 사는 법

 

 

  불황으로 회사에서 목이 잘린 사내가 방구석에 처박혀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다가 그것도 지겨워지자 책꽂이에서 <벽암록>이라는 어려운 책을 꺼내 보았더니 거기에 이런 얘기가 있었다고

 

  옛날 마조선사라는 분이 나이 들어 골골하는 신세가 됐는데 그 절 원주가 찾아와 '요즘 법체 청안하신지요'라고 문안하자 선사는 웃으면서 '일면불(日面佛) 월면불(月面佛)이야' 라고 대답했다고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말씀인지 알 수가 없어 늙은 호박처럼 쭈그러진 암자 노스님에게 물어봤더니 스님은 무심한 듯 눈을 감고 '오늘 죽어도 좋고, 내일까지 살면 더 좋고’라고 말해주었다고

 

  그는 섣달 그믐밤 문밖으로 나서다가 찬바람 불어 호롱불마저 꺼버린 듯 되레 답답한 생각이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는데 그때 마침 빌로드보다 검은 밤하늘에서 별들이 총총 새로 돋아나고 있었다고

 

 


 

 

홍사성 시인 / 나의 반야심경

 

 

  햇살 노란 가을, 양평 용문사 절 앞 늙은 은행나무

  온몸 흔들며 <반야심경> 외운다

 

  봄볕에 새순 틔워 이파리는 마른 가지 속에 들어 있다고

  갈바람으로 우수수 낙엽지게 하고는 푸른 잎이 노란 잎과 다르지 않다고

 

  한 뼘 노을에 정신 팔려 은행잎에 새긴 말씀 다 알아듣지는 못했다

  보고 싶고 듣고 싶고 맡고 싶고 먹고 싶고 만지고 싶고 알고 싶은 게 너무 많은

  빈 염불만 하는 떠돌이

 

  물구나무서서 헛꿈 꾼 세월 참 길었다

 

  그런데 요즘은 어쩐 일인지 천년 은행나무가 보이고 계곡 물소리까지 들린다

  눈 뜨지 않아도 보이고 귀 대지 않아도 들린다

 

  혹시 모르겠다, 이러다간 어느 날 갑자기 대나무 쪼개지듯 이목(耳目)이 열려

  내 몸으로 하는 설법 내가 듣게 될지

 

 


 

 

홍사성 시인 / 화신(花信)

 

 

  무금선원 뜰 앞 늙은 느티나무가

  올해도 새순을 피워 편지를 보내왔다

  내용인즉 별것은 없고

  세월 밖에서는

  태어나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이

  말만 다를 뿐 똑같은 것이라는 말씀

  그러니 가슴에 맺힌

  결석(結石) 같은 것은 다 버리고

  꽃도 보고 바람 소리도 들으며

  쉬엄쉬엄 쉬면서 살다 가란다

 

 


 

 

홍사성 시인 / 방(房)

 

 

공술 한잔 얻어먹고 들어온 날이던가 그녀는 됫박만한 방에 토끼처럼 누워 자는 척하며 쳐다보지도 않았다 무슨 일이냐며 옆구리 툭 건드렸더니 전세 올리겠다는 통보를 받았는데 산수가 안 나온다고 마른 목소리로 말을 더듬었다 얼마냐고 묻자 적금을 깨도 백만 원 만들기 어렵다고 했다 내 월급이 이십만 원쯤 하던 때였다

 

새집 마련하고 이사한 날 밤 아이들은 즈들 방 생겼다며 좋아하다 잠들고 그녀는 더 치울 것도 없는 방바닥만 자꾸 닦았다 정리는 내일 하자며 방 한가운데 이불을 폈더니 꼭 운동장에 누운 것처럼 허전하다며 쉬 잠들지 못했다 이부자리를 벽 쪽으로 붙여주자 그제야 편한 숨소리가 들렸다 칠년 만에 다리 뻗고 누운 잠자리였다

 

 


 

홍사성 시인

강원 강릉 출생.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졸업. 2007년 《시와 시학》으로 등단. 불교신문 주필, 불교평론 주간, 불교 TV 제작국장, 불교방송 상무 등을 역임. 2018년 11월 단시조 담은 신작 시집 ‘고마운 아침’ 출간. 저서로는 시집으로 『내년에 사는 법』(책만드는 집, 2011)와 그밖의 저서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다』외 다수 있음. 현재 월간 『유심』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