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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사성 시인 / 호천망극
지친보다 가깝던 사형님이 입적했다
회자정리라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나
거짓말 할 곳 없는 게 가장 허전하다
홍사성 시인 / 고마운 아침
아침마다 주름 얼굴 무덤덤 바라보며 마주 앉아 밥 먹고 빈말도 섞으며 사네
이보다 더 고마운 일 세상 어디에 있는가
홍사성 시인 / 쿠무타거 모래언덕 -실크로드 시편 18
발목이 푹푹 빠져 걸을 수가 없었다
올라가려 할수록 자꾸만 미끄러졌다
지금껏 걸어온 길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홍사성 시인 / 윤창화
불교출판 30년 넘게 한 내 친구 윤창화 나이 들수록 목소리 그윽해져 오대산 상원사 범종 소리 듣는 것 같다
누구는 그가 아침저녁 범종 소리 듣고 자라서 그렇다고 하지만 보면 볼수록 그게 아니다
천 년 범종 소리보다 더 오래가는 종소리 세상에 그런 게 있다면 그걸 하겠다며 오로지 책 만드는 일만 한 탓이다
깊은 밤 눈감고 있으면 오대산 솔바람까지 한 보따리 풀어놓고 귀나 맑히자고 씨익 웃는 내 친구 윤창화
홍사성 시인 / 연신내 시장
각자에게 허락된 점포는 세평 남짓
여기에 목숨 걸고 평생을 살아간다
하루도 쉬는 날 없이
순대 속 비벼 넣으며
계간 『시조시학』2019년 가을호에서
홍사성 시인 / 내년에 사는 법
불황으로 회사에서 목이 잘린 사내가 방구석에 처박혀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다가 그것도 지겨워지자 책꽂이에서 <벽암록>이라는 어려운 책을 꺼내 보았더니 거기에 이런 얘기가 있었다고
옛날 마조선사라는 분이 나이 들어 골골하는 신세가 됐는데 그 절 원주가 찾아와 '요즘 법체 청안하신지요'라고 문안하자 선사는 웃으면서 '일면불(日面佛) 월면불(月面佛)이야' 라고 대답했다고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말씀인지 알 수가 없어 늙은 호박처럼 쭈그러진 암자 노스님에게 물어봤더니 스님은 무심한 듯 눈을 감고 '오늘 죽어도 좋고, 내일까지 살면 더 좋고’라고 말해주었다고
그는 섣달 그믐밤 문밖으로 나서다가 찬바람 불어 호롱불마저 꺼버린 듯 되레 답답한 생각이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는데 그때 마침 빌로드보다 검은 밤하늘에서 별들이 총총 새로 돋아나고 있었다고
홍사성 시인 / 나의 반야심경
햇살 노란 가을, 양평 용문사 절 앞 늙은 은행나무 온몸 흔들며 <반야심경> 외운다
봄볕에 새순 틔워 이파리는 마른 가지 속에 들어 있다고 갈바람으로 우수수 낙엽지게 하고는 푸른 잎이 노란 잎과 다르지 않다고
한 뼘 노을에 정신 팔려 은행잎에 새긴 말씀 다 알아듣지는 못했다 보고 싶고 듣고 싶고 맡고 싶고 먹고 싶고 만지고 싶고 알고 싶은 게 너무 많은 빈 염불만 하는 떠돌이
물구나무서서 헛꿈 꾼 세월 참 길었다
그런데 요즘은 어쩐 일인지 천년 은행나무가 보이고 계곡 물소리까지 들린다 눈 뜨지 않아도 보이고 귀 대지 않아도 들린다
혹시 모르겠다, 이러다간 어느 날 갑자기 대나무 쪼개지듯 이목(耳目)이 열려 내 몸으로 하는 설법 내가 듣게 될지
홍사성 시인 / 화신(花信)
무금선원 뜰 앞 늙은 느티나무가 올해도 새순을 피워 편지를 보내왔다 내용인즉 별것은 없고 세월 밖에서는 태어나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이 말만 다를 뿐 똑같은 것이라는 말씀 그러니 가슴에 맺힌 결석(結石) 같은 것은 다 버리고 꽃도 보고 바람 소리도 들으며 쉬엄쉬엄 쉬면서 살다 가란다
홍사성 시인 / 방(房)
공술 한잔 얻어먹고 들어온 날이던가 그녀는 됫박만한 방에 토끼처럼 누워 자는 척하며 쳐다보지도 않았다 무슨 일이냐며 옆구리 툭 건드렸더니 전세 올리겠다는 통보를 받았는데 산수가 안 나온다고 마른 목소리로 말을 더듬었다 얼마냐고 묻자 적금을 깨도 백만 원 만들기 어렵다고 했다 내 월급이 이십만 원쯤 하던 때였다
새집 마련하고 이사한 날 밤 아이들은 즈들 방 생겼다며 좋아하다 잠들고 그녀는 더 치울 것도 없는 방바닥만 자꾸 닦았다 정리는 내일 하자며 방 한가운데 이불을 폈더니 꼭 운동장에 누운 것처럼 허전하다며 쉬 잠들지 못했다 이부자리를 벽 쪽으로 붙여주자 그제야 편한 숨소리가 들렸다 칠년 만에 다리 뻗고 누운 잠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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