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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문성해 시인 / 점심 꽃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5. 17.

문성해 시인 / 점심 꽃

 

 

지난밤 나리 태풍에 코스모스가 무더기무더기로

넘어져 있다

온갖 악다구니 빛깔이 뒤범벅이다

 

저 난리 속에서도

저 아비규환 속에서도 피는 꽃이 있다

쌈박하게 죽지도 못하고 지지리 못나게 피는 꽃이 있다

그래도 한번은 피고 죽어야 한다고 모질게

피는 꽃이 있다

 

숨 막히게 피는 꽃

마음에 점을 찍는 점심처럼

제 마음에 점을 찍고 가는 꽃이 있다

제 마음에 피고 가는 가늘디가는 꽃이 있다

 

《입술을 건너간 이름》창비.2012

 

 


 

 

문성해 시인 / 첫 기차에는 창(窓)이 많다

 

 

새벽에 행신역으로 설 기차표를 끊으러 가는데

첫 기차가 지나간다

거대한 환형동물처럼.

 

따뜻한 대화 같기도

무슨 열린 페이지 같기도 한

창문들이 지나간다

한 줄의 섬광처럼.

 

꽝 꽝 언 들판 위로

쩍 들러붙은 새벽과 밤을

야금야금 떼어 놓으며 가는

따뜻한 혀 하나

 

손가락 끝에 맑게 자라는 열 개씩의 창을 달고

사람들이 역사에 길게 줄을 서 있다

 

 


 

 

문성해 시인 / 파꽃

 

 

누구에게 꺾어 줄 수도

머리에 꽂을 수도 없는 꽃

하늘 향해 종주먹질하는 꽃

 

경주 황남동 냇가 옆 공터 올해도 파꽃은 무더기무더기 피어났어라 사람들은 이끼 낀 기와 지붕 아래 깊숙한 묘혈을 파고 앉아 동자승을 모시거나 기도문을 외우거나 밖에선 안을 볼 수 없는 문을 통해 골똘히 내다보네 시푸른 파밭 사이 낮게 비행하는 잠자리들과 종일 흘레붙던 개들을

 

동그란 마이크를 매단 파꽃

성게처럼 촉수를 뻗친 파꽃

파꽃은 굵고 튼실하네

파꽃은 쿨럭쿨럭 허공을 굴러가네

 

파밭 속에서 몇 시간째 시시덕거리던 미친 여자를 내쫓으려고 동굴 속에서 해골 같은 노인 하나 지게막대기를 끌고 나오네

 

파꽃이 희번덕거리며 도망치네

파꽃이 까르르까르르 허공을 굴러가네

 

 


 

 

문성해 시인 / 시인의 말

 

 

내 언어가

새의 말이었으면 좋겠다

 

구름의 유랑이었으면 좋겠다

 

[내가 모르는 한 사람], 문학수첩, 2020.

 

 


 

 

문성해 시인

1963년 경북 문경에서 출생. 영남대 국문과 졸업. 1998년《매일신문》 신춘문예, 200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자라』(창작과비평, 2005)와 『아주 친근한 소용돌이』(랜덤하우스, 2007), 『입술을 건너간 이름’』(창비, 2012), 『밥이나 한번 먹자고 할 때』 『내가 모르는 한 사람』 이 있다. <대구시협상> <김달진문학상 젊은시인상> <시산맥 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