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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해 시인 / 점심 꽃
지난밤 나리 태풍에 코스모스가 무더기무더기로 넘어져 있다 온갖 악다구니 빛깔이 뒤범벅이다
저 난리 속에서도 저 아비규환 속에서도 피는 꽃이 있다 쌈박하게 죽지도 못하고 지지리 못나게 피는 꽃이 있다 그래도 한번은 피고 죽어야 한다고 모질게 피는 꽃이 있다
숨 막히게 피는 꽃 마음에 점을 찍는 점심처럼 제 마음에 점을 찍고 가는 꽃이 있다 제 마음에 피고 가는 가늘디가는 꽃이 있다
《입술을 건너간 이름》창비.2012
문성해 시인 / 첫 기차에는 창(窓)이 많다
새벽에 행신역으로 설 기차표를 끊으러 가는데 첫 기차가 지나간다 거대한 환형동물처럼.
따뜻한 대화 같기도 무슨 열린 페이지 같기도 한 창문들이 지나간다 한 줄의 섬광처럼.
꽝 꽝 언 들판 위로 쩍 들러붙은 새벽과 밤을 야금야금 떼어 놓으며 가는 따뜻한 혀 하나
손가락 끝에 맑게 자라는 열 개씩의 창을 달고 사람들이 역사에 길게 줄을 서 있다
문성해 시인 / 파꽃
누구에게 꺾어 줄 수도 머리에 꽂을 수도 없는 꽃 하늘 향해 종주먹질하는 꽃
경주 황남동 냇가 옆 공터 올해도 파꽃은 무더기무더기 피어났어라 사람들은 이끼 낀 기와 지붕 아래 깊숙한 묘혈을 파고 앉아 동자승을 모시거나 기도문을 외우거나 밖에선 안을 볼 수 없는 문을 통해 골똘히 내다보네 시푸른 파밭 사이 낮게 비행하는 잠자리들과 종일 흘레붙던 개들을
동그란 마이크를 매단 파꽃 성게처럼 촉수를 뻗친 파꽃 파꽃은 굵고 튼실하네 파꽃은 쿨럭쿨럭 허공을 굴러가네
파밭 속에서 몇 시간째 시시덕거리던 미친 여자를 내쫓으려고 동굴 속에서 해골 같은 노인 하나 지게막대기를 끌고 나오네
파꽃이 희번덕거리며 도망치네 파꽃이 까르르까르르 허공을 굴러가네
문성해 시인 / 시인의 말
내 언어가 . . . 새의 말이었으면 좋겠다
구름의 유랑이었으면 좋겠다
[내가 모르는 한 사람], 문학수첩,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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