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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순 시인 / 미끼
처음 만난 사람이 새끼손가락을 떼어갔다 다음 사람이 귀를 떼어갔다 다음은 입을 떼어갔다 눈을 떼어갔다 코를 떼어갔다 다음은 팔을 다리를 떼어갔다 잔머리 굴린다며 머리를 떼어갔다 그 다음 사람이 달걀귀신처럼 둥그러진 여자를 버렸다 버려진 여자는 아무데나 굴러다니며 한자리에 머물지 못했다 굴러다니다 만난 또 한 사람이 아직도 몸이 따뜻하다며 가슴을 열고 심장을 떼어갔다 어디에 부려놓아도 깨질 일 없는 여자는 이제 누구도 손댈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황희순 시인 / 몽유
소피보러 고추밭 고랑 깊숙이 숨어들어 갔어요. 워낙 급한 터라 염치불구 볼일을 보고 옷 추스르는데 어머, 마른 고춧대가 옆구리를 슬쩍 찌르는 겁니다. 돌아보니 탄저병 걸린 고추가 여기저기 애면글면 몸을 세우고 있었어요. 지그시 눌러있던 야성이 근질거리지 뭐예요. 아랫배에 고였던 피가 하르르 도는 찰나 고추밭 끄트머리 반백의 그가 한눈파는 나를 불렀어요. 고춧대를 분지르며 발길 돌리는데 비릿한 봄바람이 등을 툭 치며 다가오데요. 화악, 달떴지요 뭐.
황희순 시인 / 도피안(到彼岸)
한 성직자가 2012년 대혼란이 올 거라며 높고 깊은 산골짝에 별장을 짓는다고 했다. 금성보다 큰 혜성이 다가와 지축을 돌려놓고 어마어마한 쓰나미가 지구의 반은 쓸어갈 거라 했다. 종말이 온다 해도 우주를 말하자면 인간은 티끌만도 못할 터. 하지만 애인아, 우리 튀자. 46억 년 묵은 지구는 너무 지겹지 않은가. 종말이 오기 전에 푸른빛이 도는 젊은 별을 찾아 줄행랑치자. 40억 년 전 이미 우리 사랑은 삼엽충 DNA 속에 숨어 있었던 것. 그러니 애인아, 그 별에서 하루를 백년처럼 야금야금 파먹으며 한 만년 살자.
황희순 시인 / 손버릇
술만 마시면 무엇이든 가방에 집어넣는 버릇 있다 조약돌이나 씨앗이나 먹다 남긴 소주나 땅콩이나 맘에 드는 사람이나 하여 내 가방은 사시사철 부엉이 집이다 어지러운 가방 정리하다 보면 물컹 썩어있는 건 언제나 사람 사람은 본체만체해야지 후회하면서 그 버릇 놓지 못하고 있다 지금도 가방에서 슬슬 냄새 풍기는 사람 있으니
황희순 시인 / 술래잡기
커튼 사이로 칼날 같은 햇살이 들어온다 세상과 통하는 길이 저랬다, 좁은 그 길을 여닫으며 칼날 같은 말과 눈빛만 오래 주고받았다 꼭꼭 커튼을 여미지만 여민 틈새로 더욱더 예리한 빛이 스며든다 칼이 들어와도 다시는 커튼을 열지 않을 거야 살을 파고드는 빛은 들숨과 날숨으로 천천히 삭이면 돼 낮은 천장에 닿은 숨 절절 녹아내리는, 여기는 아늑한 무덤 아들아, 어미의 실종을 말하지 마라 영원히 종적을 감추고 싶지만, 꼬리가 너무 길어 비어지려는 징그러운 이 긴 꼬리를 손에 둘둘 말아 쥐고, 잠시 칼날을 피해 숨어 있을 뿐이니, 아들아 어미의 무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라
ㅡ『문학청춘』(2011.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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