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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길나 시인 / 벌레구멍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5. 17.

김길나 시인 / 벌레구멍

 

 

  복숭아 향이 먼 회귀선을 넘어와 지금 여기서

  붐빈다 한 알의 복숭아 안에 복숭아꽃이 들어 있다

  꽃이 입 맞춘 나비들이 꽃 속으로 들어와 날아다닌다

  모든 어제의 어제가 깨어 있는 안의 안,

  그 중첩된 내부로 누군가가 들어왔다

  도화 빛 물든 복숭아 표층에 구멍이 뚫린 날,

  저쪽 외계 생명체가 이쪽 내부로 들어왔다

  꽃에서 수상한 바람이 일고 나비가 들떠 춤추는

  이 도화 빛 우주의 비경이 순간 닫쳐지고

  외계에서 온 그의 눈이 깜깜해진다

  표층을 넘어 맞닥뜨린 이 신세계의 파도치는 어둠은,

  그러나 살이 살을 조이는 중력으로 넘쳐났다

  이 중력의 무 공간에 터널을 뚫는 일,

  집 한 채를 짓는 일

  그것은 그의 에로틱한 식사공법으로 시공되었다

  그는 실바람 부는 쪽마루로 달을 불러들여

  밤이면 향긋한 애찬을 즐겼다

  달물 드는 생살을 갉아먹고 달처럼 환해져 갔다

  탁월한 자동 건축술인 식(食}의 시공으로 지은

  집 한 채는, 그러므로 그가 존재한 자리이고

  그가 남긴 사랑의 유적지였다

  그것, 구렁이었다

 

  그에게 사랑은 밥이었으므로

  폭력이고 정복이고 그 완성은 죽임이었으므로

 

  먹히는 사랑에 병든 그녀는 물큰해지도록 농익어 갔다

  나는 구멍 뚫린 도화 빛 세상 한 알을 집어삼켰다

 

월간 『시와 표현』 2015년 4월호 발표

 

 


 

 

김길나 시인 / 시간의 천국

 

 

이곳, 시계포의 시간들을 아나키즘이 장악중이다

시간의 질서가 어긋난 공간에서 시간은 따로따로 혼자씩 제멋대로 돌아간다

 

현재가 부재중인 이 시계포에는 고장 난 오늘이 걸려 있다

수많은 시계들이 한결같이 현 시간을 지워버렸다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좋은 이 시계포에는 벌써 시간의천국 이란 입간판이 나붙었다

시간의천국에서는 어제와 내일이 나란히 붙어 있다

 

과거에서 온 정오 곁에서 미래에서 온 밤이 열한 시를 알린다

계절들은 한자리에 혼재한다

 

아직도 과거를 운행 중인 시계가 지나간 계절을 펼쳐놓을 때

자전속도가 빨라진 시간에 앞당겨온 내일의 내가 오늘의 나를 언뜻 건너다본다

이곳 시계들은 여전히 각각 다른 시간을 보여주고 있다

서로 다른 시간으로 가는 생체시계를 각자 펄떡이는 심장에 달고

이 시계포의 고객들이 시계와 시계 사이, 자유 만발한 꽃길을 오가는 동안,

시계포의 출입문이 닫혀졌다

 

현재의 출구를 찾지 못하고 헤매는 시간을

시간의 천국이 장악중이다

 

시집『시간의 천국』2016. 천년의시작

 

 


 

 

김길나 시인 / 경계에서

 

 

이곳과 저곳에서 새가 없어지고 새가 난다

경계에서 새는 죽고 새는 죽지 않았다

 

나는 죽은 새와 살아 있는 새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이곳과 저곳을 오고가는 태양이 경계에서 솟는다

아직 살해되지 않은 꽃이 오고 있다

꽃 속에 동거했던 물이 달콤하고도 거친 성분을 감추고

힘세게 바람으로 오고 있다

경계를 지우고자 꿈꾸며 경계에서 피어나는 슬픈 역설을

우리는 이곳에서 사랑이라 불렀다

 

흐르는 물, 흐르는 바람, 흐르는 불인 사랑의

열역학과 이동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므로 우리는 침묵했다

동물의 포식성을 혁파하고 사랑의 유전자를 개조한

나무들이 길의 경계에 서 있다

혁명은 경계에서 왔다

 

정복한 피로 초록을 틔운 혁명가의 긴 문법을 읽을 때

초록이 단풍빛으로 물들고 그 틈새로 제3의 문장이 일어선다

자신으로부터의 혁명은 번번이 자가 숙청되곤 했다

집의 경계에 말뚝 박은 울타리가 견고해져 갔다

 

이곳에서 죽은 별들의 불변의 에너지가 그곳으로

건너가 폭풍이 인다 파도가

넘어온다 이곳에 사건을 부려놓는다

 

소년이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과 바닥의 경계에서 소년이 사라졌다

 

사건은 모든 경계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다

경계에서 나는 살아 있고 나는 죽어 있다

 

계간 『시와 표현』 2012년 겨울호 발표

 

 


 

김길나 시인

1940년 전남 순천에서 출생. 1995년 시집 <새벽 날개>를 상자하면서 시단에 나왔으며, 1996년『문학과사회』가을호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빠지지 않는 반지』(문학과지성사, 1997)와  『둥근 밀떡에 뜨는 해』(문학과지성사, 2003) 와  『홀소리 여행』, 『일탈의 순간』가 있음. 산문집『잃어버린 꽃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