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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사성 시인 / 치통(齒痛)
어금니가 아파 날밤을 샜다
온 세상은 그물코처럼 이어져있다 하나가 아프면 모두가 아프다
유마경의 이 말씀 잠들만하면 욱신욱신 되살아났다
새벽녘, 별 하나 반짝 빛났다
홍사성 시인 / 예쁜 꽃
예쁜 얼굴 자랑하려 피는 게 아니구나 남 보기 좋으라고 피는 게 아니구나 봄 와서 몸 더워지니 못 견뎌 피는구나 꽃이든 사람이든 바위든 그 무엇이든 진짜 예쁜 것들은 나대지 않는구나 조용히, 그저 조용히 웃기만 하는구나
「터널을 지나며」(2020, 책만드는집)
홍사성 시인 / 성자의 길
살아서는 논매고 밭 갈고 등짐 나르고 달구지 끌고 자식도 몇 남 몇 녀씩 낳아 기르고
죽어서는 피와 살을 내놓고 뼈는 사골국으로 끓이고 가죽은 구두와 가방 만들게 하고
부처와 예수도 걷지 않은 길 마른 눈물 참으며 혼자 걸어간 소보다 더 소 같있던
눈뜨고 보면 절망 눈감고 생각하면 또 그리운 아버지
-시집 터널을 지나며에서-
홍사성 시인 / 몸을 철학해보니
몸이 전부다
몸이 있어 숨쉬고 몸이 있어 일하고 몸이 있어 사랑하는 거다 그래서 몸에 충성하는 거다 몸을 우습게 보지 마라 몸한테 잘 보이려고 옷 입고 몸 배고프지 말라고 밥 먹고 몸 쉬게 하려고 집 짓는 거다 그래서 악착같이 돈 벌려고 하는 거다
몸이 있으니 살아 있는 거다, 몸이 전부다
홍사성 시인 / 발바닥
"맨 밑바닥이라고 무시하지 마세요
발뒤꿈치만도 못하다는 말 함부로 하지 마세요
아무리 구척장사라도 발바닥 아니면 일어설 수 없지요
상처 난 발바닥에 약 바르다 한마디 들은 말입니다."
홍사성 시인 / 마지막 정찬
당신 사랑을 독차지해서 좋아요 당뇨로 한쪽 발목 자르도록 혼자 밥 먹게 한 게 미안해 일찍 들어갔더니 날마다 식단 바꿔가며 정찬 차려내더란다 다 먹지도 못할 걸 왜 억지 고생이야 안쓰러운 마음에 핀잔 줘도 호박꽃처럼 웃기만 하더니 함박눈 쏟아지던 어느 날 그 웃음 남겨놓고 눈 감더란다 내자도 떠날 걸 알고 있었던 말이지 그런 것 같아 매일 이별 밥상을 차렸던 게 아닌가 싶어 그러니까 몇 달간은 늘 마지막 밥상을 받은 셈이지 혹시 화장실 가서 몰래 웃는 거 아녀 누가 위로랍시고 객쩍은 농담 꺼냈지만, 사내들은 술청 밖으로 고개 돌리고 술잔만 들었다 놨다 하다 일어섰다
홍사성 시인 / 고물자동차
언제부턴가 자동차가 이상하다 벨트를 교환하면 오일이 새고/ 시동을 걸 때마다 엔진이 켁켁댄다 가끔씩 타이어도 펑크다 정비사 말로는/ 연식이 오래되면 다 그렇단다 폐차할 때는 아니니 고쳐가며 타란다
홍사성 시인 / 불사
김천 직지사는 중창불사를 하면서 부처님 법문 들을 때 올라가는 황학루를 약간 비껴 지었다 합니다 하필이면 누각 지을 자리에 못생긴 개살구나무 한그루가 있었는데 그 나무 살리려고 그랬다 합니다 쓸모없다고 베어내자는 사람 여럿이었으나 주지스님이 고집을 부려 할 수 없이 비뚜름하게 지었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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