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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휘민 시인 / 못에 걸린 남자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5. 17.

휘민 시인 / 못에 걸린 남자

 

 

  에스컬레이터에 발을 올렸을 때 그는

  키득키득 등짝에 달라붙는 웃음소리를 들었다

  그의 양쪽 견갑골 사이가 불룩하게 솟아 있었던 것

  어젯밤 비틀거리며 벽에 걸렸던 단벌 점퍼가

  대못의 둥근 대가리와 또 하루를 흥정한 대가였다

 

  급하게 얻고 보니 유난히 못이 많은 집이었다

  얼핏 세어도 손바닥의 굳은살보다 많아 보였다

  그 집에 잘못 배달된 택배처럼 부려졌을 때

  그는 더 이상 그녀를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쯤 그녀도 어느 흠집 많은 바람벽에 기대어

  고리못이 되어가고 있을 것이므로

  그날부터 그는 못들의 옷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 남자 의자에 앉아 아침을 망치질한다

  꾸벅꾸벅 이마가 허공을 내리칠 때마다

  뒷덜미에 박힌 대못이 들썩거린다

  빠질 듯 말 듯 실랑이하는 반동 사이로

  날것으로 비어져 나온 치질처럼

  생의 숙취 밀려온다

 

  못에 걸린 한 남자 직장에 간다

 

 


 

 

휘민 시인 / 속도의 오르가슴 3

 

 

  첫 경기는 일주일 전 죽은 기수를 애도하며 시작되었다

  그날 기수가 말과 함께 꼬꾸라지는 순간

  마권을 구겨 버리는 이들이 있었다

  구관부터 신관까지 관람석을 가득 메운 사람들

  모니터가 있는 곳은 어디라도 경마장이었다

  오른팔을 잃어버린 외팔이 중년도

  연신 담배를 빨아대는 볼이 홀쭉한 노년도

  경마 잡지 뒤적이며 승률 계산에 열이 오른 청년도

  바라는 건 오직 하나 대박

 

  마지막 경기 마권 판매액이 8억을 넘겼다

  시원한질주, 단가네, 신흥강호, 하이웨이스타, 시크릿웨펀, 속도보은, 만왕, 뉴파이터, 바람사이로, 낭만질주, 스피드웨이

  열한 마리 말들이 출발선에 서 있다

  총성이 울린다

  일주일 전 기수의 척추를 밟은 말이 달린다

  기수의 죽음을 지켜본 말들이 달린다

  관람석의 이글거리는 눈동자들이 달린다

  속도에 사로잡힌 영혼을 채찍질하며 달리고 또 달린다

 

 


 

 

휘민 시인 / 껍질

 

 

  언제나 플러그가 꽂혀 있는 무선청소기

  온종일 전기를 마셔도 정작 실전에선

  일 분도 못 버티고 신음을 토하지

  하루하루 소멸을 삼키는 늙은 고양이

  무선청소기 속엔 시간의 지층이 있지

  몸을 떠난 머리카락들 하나둘 거두어

  똬리 틀 듯 켜켜이 사려놓은 것은

  머리카락 사이를 떠도는 먼지들이라네

  밤이 되면 그 하얀 먼지들 별처럼 빛나지

  검은 머리카락들은 거대한 은하계가 된다네

  무선청소기는 우주를 품은 별들의 자궁

  늙은 고양이가 가르릉 가르릉 신호를 보내면

  온 우주가 운행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지

  윙윙거리던 진동이 멎는 그 순간

  우주의 심연을 뚫고 어린 별들이 깨어난다네

  그런 밤이면 많은 별들이 한쪽으로 쏟아지곤 했지

  사람들은 유성이라 불렀지만 나는 알고 있었네

  그것이 어린 별들을 품었던 둥근 껍질이라는 걸

  오늘 늙은 고양이의 도시엔 불빛들 흥건하고

  멍울진 빛의 무덤가에서 올려다본 하늘엔

  별들의 주검 아슴아슴 반짝이고 있네

  나 이제 목울대 치밀던 뜨거운 욕망을 벗네

  새하얀 먼지 되어 새벽까지 그리운 별들 앞에 서네

 

 


 

 

휘민 시인 / 초본을 떼다

 

 

  여기 내가 살아온 집들의 이력이 있다

  동사무소 직원이 야물게 박아놓은 두 장의 종이 속에

  윙윙윙 벌떼처럼 귓가를 맴돌던 풍구소리

  햇살 좋은 망종날 앞마당에는

  보리나락 날리는 아버지의 힘찬 어깨 눈부시고

  아홉 살 나는 막걸리 몰래 마시고 보리밭 가를 헤맨다

  깔끄러운 보리 이삭에 얼굴을 묻어 봐도

  풍구소리 요란하던 우리 집은 멀기만 하고

  앞산에선지 뒷산에선지 해종일 뻐꾸기만 울어대고

  나는 도랑에 빠진 신발 한 짝 가까스로 손에 쥐고

  저녁 어스름까지 게걸음으로 집을 찾아다닌다

  가만히 눈 감으면 이슬 오른 돌담 사이로

  저벅저벅 풀냄새 걸어 들어오는 집

  내 몸에 아로새겨진 기억들과

  나를 기억하는 서까래와 흙벽들이

  밤새도록 수런거리던 푸릇한 유년의 뒤뜰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그 안에 나만 없는

 

 


 

 

휘민 시인 / 시간을 모으는 사람

 

 

  노인들은 시간이 아주 많은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등이 구부정하고 어깨가 쳐진 것은

  오랜 동안 시간의 봇짐을 져 온 탓이다

  낡은 가구나 금 간 도자기

  숫자가 희미해진 텔레비전 리모컨이나

  등이 반질반질한 바둑돌 같은 곳엔

  그들이 몰래 부려놓은 시간의 지층이 있다

  내가 그의 집에 처음 갔을 때 나를 맞이한 것은 시계였다

  그의 시계들은 벽에 걸려서, 배가 불룩한 백자 항아리에 기대서,

  거실장 위에 두서없이 늘어서서, 위아래로 나를 훑어보았다

  그는 말이 없었지만 시계들은 쉴 새 없이 조잘댔다

  1989년 7월엔 창신새마을금고 개업식에 참석했고

  2001년 4월엔 이준희 돌잔치에 다녀왔다고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한 벽시계 하나는 그가 총무를 맡고 있는

  세종친목회가 1996년에 30주년을 맞이했다고 일러주었다

  벽걸이용 시계, 수건걸이용 시계, 욕실용 방수시계, 탁상용 알람시계…….

  예닐곱 개 남짓한 시계들이 용케도 같은 시간을 가리킨다

  쉼 없이 건전지 갈아 끼우며

  오늘까지 끌고 온 빛바랜 기억의 고집

  구부러지고 휘어진 채 세월의 주낙을 낚아챈 초침들

  이마에 돋아난 검버섯 사이로 그림자를 숨겼을

  헐거워진 손목에서 미끄러져 시계 너머로 달아났을

  이젠 쓸모를 잃어버린 궁벽한 기다림의 날들

  강물이 풀리고 봄이 왔다

  그가 모아온 시간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새로 태어날 시간을 위해 순간은 철저히 부서져야 하기에

 

 


 

휘민 시인

1974년 충북 청원에서 출생. 충주대학교(구 청주과학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한국디지털대학교 문화예술학과. 200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개신고물상〉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생일 꽃바구니』(서정시학, 2006) 가 있음. 현재 '시힘' 동인으로 활동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