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세복 시인 / 봄날의 승부
이른 봄의 정원에서는 가위바위보가 한창이었다 나무는 자신의 가지를 보자기처럼 펼쳐 보였고 그때마다 사내가 다가와 말없이 가위를 내밀었다 나무는 번번히 패했고 벌칙처럼 가지가 하나씩 잘렸다 먼 곳의 가지마저 내준 후 듬성듬성 몸뚱이가 가위처럼 남아 드디어 사내와 비길 수 있었다 이제 어쩔 수 없다는 듯 사내가 가위질을 멈추었다
소나무는 그제야 빈 가지 사이로 바람을 끌어와 휘파람을 불 수 있었다
<시와소금 2020 겨울호>
배세복 시인 / 몬드리안의 담요
성큼성큼 들어와 붉은 사각형을 담요에 던지며 그가 말했다 너희들에게 어울리는 빛이야 그때부터 그는 우리집 벽에 살았다 어느 해 나는 내 서재를 한 번도 열어주지 않으면서도 간신히 아내의 장롱 속에 들어간 적 있다 캄캄했다 오래 전 걸어두었던 희망 같은 단어에 곰팡이가 슬기 시작했다 그날 그는 검푸른 색깔을 마구 칠했다 살짝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그 무렵 나는 회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유사한 색깔의 연속은 불안을 가져온다 마치 잘못 맞춰진 목욕탕 타일의 무늬처럼, 그리하여 바람 푸르던 날 우리는 감탄사들을 날려 보냈다 공중에서 흩어지는, 알고 보니 겨우 몇 개 밖에 안 되던 노란 한숨 같은 것, 올해에는 어떤 색을 보여줄까 형형색색의 아주 큰 보석을 보여줄게! 그는 한 해에 하나씩 그린 아홉 개의 사각형에 테두리를 치고 있었다 집을 지은 후 귀퉁이를 여러 날 마름질하듯 천천히, 잠이 덜 깬 우리들을 격자무늬로 엮어주며 서서히 벽 속으로 사라져갔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문숙 시인 / 첫사랑 외 2편 (0) | 2021.05.17 |
|---|---|
| 맹문재 시인 / 한 그루의 나무를 위하여 외 3편 (0) | 2021.05.17 |
| 휘민 시인 / 못에 걸린 남자 외 4편 (0) | 2021.05.17 |
| 반연희 시인 / 뿌리 없는 나무 외 1편 (0) | 2021.05.17 |
| 홍사성 시인 / 슬픔의 무게 외 8편 (0) | 2021.05.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