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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문성해 시인 / 민달팽이들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5. 16.

문성해 시인 / 민달팽이들

 

 

지하 사우나 앞을 지나는데

환풍기에서 훅 끼쳐 나오는 열기, 살 냄새들

지금 내가 밟고 선 깊고 깊은 땅 속 나라에

벌거숭이들이 버글버글하다는 상상을 해본다

 

헬스에서 PC방에서 식당까지

그곳에는 없는 게 없다

아침부터 한밤까지 내처 사는 여편네들도 있다

지상은 이제 피곤한 싸움터일 뿐,

그곳은

수술자국 남겨진 아랫배를 다 드러내어도

부끄럽지 않은 해방터가 된지 오래,

 

들어갔다 나오는 얼굴들이 다 하얗다

눈부신 나자로의 얼굴도 저랬을까

죽음 이후가 제발 그렇다면

먼저 가신 부모 형제들과

아기 때처럼 발가벗고 앉아

오로지 득도에만 골몰한

민달팽이로 모여 사는 것도 행복한 일

 

오늘 무언가를 잊고 싶다면

지하 사우나로 가보라

그곳 환풍기에서 올라오는 훈김만으로도

한 겨울에

라일락이 저리 만개한

 

 


 

 

문성해 시인 / 하문(下問)

 

 

이 길고 멀고 오래된 것은 어디서 오나

 

이 차고 습습하고 묵은내가 나는

내 철들자 맞기 시작한

어떤 상담 교사보다도 더

귀에 쏙 맞는 말씀을 담아주는 이것은

 

내 어미가 싱싱한 허벅지를 걷고

한바탕 헌 칫솔로 시멘트 마당을 벗기고 나면

꼭 들이닥치던 이것은

내 아비가 장롱 손잡이에 혁대를 걸고

면도칼을 갈며 바라보던 이것은

 

내 이마를 지나 코끝을 지나

장미 꽃잎을 지나 꽃받침을 지나 잎사귀를 지나

땅에서 난민처럼 버글거리는 이것은

 

먼 산도 넓은 벌도 앞 도랑도

막 매달리기 시작한 포도도 착하게 맞고 있는 이것은

마침내 자두 맛 참외맛 수박맛도 다 업어가는 이것은

 

 


 

 

문성해 시인 / 목련의 상부

 

 

아침에 가르마가 벌어진 채

육층에서 내려다보니

목련꽃들의 벌어진 정수리가 훤하다

 

아침부터 모여 떠드는

우리 라인 아줌마들의 억센 사투리와

사층 노인네의 담배꽁초까지 다 받아내던

저 정수리

 

그 속에

햇살과 바람과 비가 심어놓은

탱탱한 씨앗들

옹골차게 자라고 있음을 생각한다

 

바람이 가만히 내 정수리 가르마를 벌리고 간다

씨앗처럼 주름진 영근 얼굴을 들어올린 채

비질을 하던 경비원 김씨가 문득 알은체를 한다

 

 


 

 

문성해 시인 / 두릅

 

 

농아 아저씨 한 분이 갖다 준 참두릅

베란다에 둔 채 까맣게 잊고 있다가

어느 날 신문지에서 펴보니

가시가 잔뜩 세어져 있다

 

김포문예대학 첫 수업 때

내게 입 좀 크게 열어 말해달라던 그가

수업 때면 맨 앞자리에서

귀에 두 손을 나팔처럼 대고 엎질러진 튀밥처럼

내 소리를 쓸어담다가

언젠가부터는 그마저도 더럽게 안 읽히는지 보이지 않길래

나는 그가 어느 산비탈 두릅나무에게서

계속해서 시를 배울 것이란 생각을 했다

 

몸에서 목소리 대신 가시가 나오는

그 두릅나무 선생은 때가 되면

울퉁불퉁 몸엣것을 툭툭 불거지게 내놓으며

나처럼 달달한 칭찬 대신

날카로운 가시들을 마구 방출할 것이다

맘에 안 들면 아예 벌판 위로 벌렁 내다꽂을 것이다

 

그 두릅나무 선생이 보내온 가시 앞에

이제야 쪼그리고 앉으니

막 세어지기 시작한 두릅나무 앞에서의

서두르던 기척과

푸르죽죽 두릅물이 오른 손목과

웅웅거리는 불편한 귓속이 보인다

귓바퀴 앞에까지 와서 되돌아가던 새소리도 들린다

 

《시와사람》2017년 봄호

 

 


 

 

문성해 시인

1963년 경북 문경에서 출생. 영남대 국문과 졸업. 1998년《매일신문》 신춘문예, 200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자라』(창작과비평, 2005)와 『아주 친근한 소용돌이』(랜덤하우스, 2007), 『입술을 건너간 이름’』(창비, 2012), 『밥이나 한번 먹자고 할 때』 『내가 모르는 한 사람』 이 있다. <대구시협상> <김달진문학상 젊은시인상> <시산맥 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