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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해 시인 / 민달팽이들
지하 사우나 앞을 지나는데 환풍기에서 훅 끼쳐 나오는 열기, 살 냄새들 지금 내가 밟고 선 깊고 깊은 땅 속 나라에 벌거숭이들이 버글버글하다는 상상을 해본다
헬스에서 PC방에서 식당까지 그곳에는 없는 게 없다 아침부터 한밤까지 내처 사는 여편네들도 있다 지상은 이제 피곤한 싸움터일 뿐, 그곳은 수술자국 남겨진 아랫배를 다 드러내어도 부끄럽지 않은 해방터가 된지 오래,
들어갔다 나오는 얼굴들이 다 하얗다 눈부신 나자로의 얼굴도 저랬을까 죽음 이후가 제발 그렇다면 먼저 가신 부모 형제들과 아기 때처럼 발가벗고 앉아 오로지 득도에만 골몰한 민달팽이로 모여 사는 것도 행복한 일
오늘 무언가를 잊고 싶다면 지하 사우나로 가보라 그곳 환풍기에서 올라오는 훈김만으로도 한 겨울에 라일락이 저리 만개한
문성해 시인 / 하문(下問)
이 길고 멀고 오래된 것은 어디서 오나
이 차고 습습하고 묵은내가 나는 내 철들자 맞기 시작한 어떤 상담 교사보다도 더 귀에 쏙 맞는 말씀을 담아주는 이것은
내 어미가 싱싱한 허벅지를 걷고 한바탕 헌 칫솔로 시멘트 마당을 벗기고 나면 꼭 들이닥치던 이것은 내 아비가 장롱 손잡이에 혁대를 걸고 면도칼을 갈며 바라보던 이것은
내 이마를 지나 코끝을 지나 장미 꽃잎을 지나 꽃받침을 지나 잎사귀를 지나 땅에서 난민처럼 버글거리는 이것은
먼 산도 넓은 벌도 앞 도랑도 막 매달리기 시작한 포도도 착하게 맞고 있는 이것은 마침내 자두 맛 참외맛 수박맛도 다 업어가는 이것은
문성해 시인 / 목련의 상부
아침에 가르마가 벌어진 채 육층에서 내려다보니 목련꽃들의 벌어진 정수리가 훤하다
아침부터 모여 떠드는 우리 라인 아줌마들의 억센 사투리와 사층 노인네의 담배꽁초까지 다 받아내던 저 정수리
그 속에 햇살과 바람과 비가 심어놓은 탱탱한 씨앗들 옹골차게 자라고 있음을 생각한다
바람이 가만히 내 정수리 가르마를 벌리고 간다 씨앗처럼 주름진 영근 얼굴을 들어올린 채 비질을 하던 경비원 김씨가 문득 알은체를 한다
문성해 시인 / 두릅
농아 아저씨 한 분이 갖다 준 참두릅 베란다에 둔 채 까맣게 잊고 있다가 어느 날 신문지에서 펴보니 가시가 잔뜩 세어져 있다
김포문예대학 첫 수업 때 내게 입 좀 크게 열어 말해달라던 그가 수업 때면 맨 앞자리에서 귀에 두 손을 나팔처럼 대고 엎질러진 튀밥처럼 내 소리를 쓸어담다가 언젠가부터는 그마저도 더럽게 안 읽히는지 보이지 않길래 나는 그가 어느 산비탈 두릅나무에게서 계속해서 시를 배울 것이란 생각을 했다
몸에서 목소리 대신 가시가 나오는 그 두릅나무 선생은 때가 되면 울퉁불퉁 몸엣것을 툭툭 불거지게 내놓으며 나처럼 달달한 칭찬 대신 날카로운 가시들을 마구 방출할 것이다 맘에 안 들면 아예 벌판 위로 벌렁 내다꽂을 것이다
그 두릅나무 선생이 보내온 가시 앞에 이제야 쪼그리고 앉으니 막 세어지기 시작한 두릅나무 앞에서의 서두르던 기척과 푸르죽죽 두릅물이 오른 손목과 웅웅거리는 불편한 귓속이 보인다 귓바퀴 앞에까지 와서 되돌아가던 새소리도 들린다
《시와사람》2017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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