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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백무산 시인 / 초심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5. 18.

백무산 시인 / 초심

 

 

눈 오는 아침은

설날만 같아라

 

새 신 신고 새 옷 입고

따라나서던 눈길

어둠 속 앞서가던 아버지 흰

두루막 자락 놓칠세라

종종걸음치던 다섯 살

첫길 가던 새벽처럼

 

눈 오는 아침은

첫날만 같아라

 

눈에 젖은 대청마루

맨발로 나와

찬바람 깔고 앉으니

가부좌가 아니라도

 

살아온 흔적도 세월도

흰 눈송이 위에 내리는

흰 눈송이 같은데

 

투둑, 이마를 치는

눈송이 몇

몸을 깨우는 천둥 소리

 

아, 마음도 없는데

몸 홀로 일어나네

몸도 없는데

마음 홀로 일어나네

 

천지사방 내리는 저 눈송이들은

누가 설하는 무량법문인가

 

눈 오는 아침은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첫날만 같아라

 

 


 

 

백무산 시인 / 축의 시간

 

 

굵은 비 쏟아지는 산길

키 낮은 병꽃나무에 튼 둥지에서

새 한마리

알을 품고 있다 억수같이 퍼부어대는 비를 다 맞고

 

날개 지붕을 펴 둥지를 덮고

떨고 있다 쏟아지는 것은 쏟아지라고

 

알은 해석으로 풀려나올 수 없다

어떤 문법으로도 풀려나올 수 없다

어떤 언어로도 깨어나게 할 수 없다

품을 수밖에 없다

 

시작과 끝이 맞물린 알

시제가 없는 알

 

지금은 축의 시간

주둥이가 막힌 병

거센 물살 가운데 정지한 나무

꼭지가 막 떨어진 사과의 시간

 

지금은 오직 전체를 기울여야 할 때

시간은 수컷처럼 둥지 밖에서

초조하게 서성일 뿐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 창비시선, 2020년

 

 


 

백무산 시인

1955년 경북 영천에서 출생. 1984년 《민중시》 1집에서 <지옥선>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만국의 노동자여』(청사, 1988), 『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노동해방문학사. 1990), 『인간의 시간』(창비, 1996), 『길은 광야의 것이다』(창비. 1999), 『초심』( 실천문학사, 2003), 『길 밖의 길』( 갈무리, 2004), 『거대한 일상』(창비, 2008)이 있음. 이산문학상, 만해문학상, 아름다운 작가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