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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무산 시인 / 초심
눈 오는 아침은 설날만 같아라
새 신 신고 새 옷 입고 따라나서던 눈길 어둠 속 앞서가던 아버지 흰 두루막 자락 놓칠세라 종종걸음치던 다섯 살 첫길 가던 새벽처럼
눈 오는 아침은 첫날만 같아라
눈에 젖은 대청마루 맨발로 나와 찬바람 깔고 앉으니 가부좌가 아니라도
살아온 흔적도 세월도 흰 눈송이 위에 내리는 흰 눈송이 같은데
투둑, 이마를 치는 눈송이 몇 몸을 깨우는 천둥 소리
아, 마음도 없는데 몸 홀로 일어나네 몸도 없는데 마음 홀로 일어나네
천지사방 내리는 저 눈송이들은 누가 설하는 무량법문인가
눈 오는 아침은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첫날만 같아라
백무산 시인 / 축의 시간
굵은 비 쏟아지는 산길 키 낮은 병꽃나무에 튼 둥지에서 새 한마리 알을 품고 있다 억수같이 퍼부어대는 비를 다 맞고
날개 지붕을 펴 둥지를 덮고 떨고 있다 쏟아지는 것은 쏟아지라고
알은 해석으로 풀려나올 수 없다 어떤 문법으로도 풀려나올 수 없다 어떤 언어로도 깨어나게 할 수 없다 품을 수밖에 없다
시작과 끝이 맞물린 알 시제가 없는 알
지금은 축의 시간 주둥이가 막힌 병 거센 물살 가운데 정지한 나무 꼭지가 막 떨어진 사과의 시간
지금은 오직 전체를 기울여야 할 때 시간은 수컷처럼 둥지 밖에서 초조하게 서성일 뿐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 창비시선, 20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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