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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홍사성 시인 / 치통(齒痛)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5. 18.

홍사성 시인 / 치통(齒痛)

 

 

어금니가 아파 날밤을 샜다

 

온 세상은 그물코처럼 이어져있다

하나가 아프면 모두가 아프다

 

유마경의 이 말씀

잠들만하면 욱신욱신 되살아났다

 

새벽녘, 별 하나 반짝 빛났다

 

 


 

 

홍사성 시인 / 예쁜 꽃

 

예쁜 얼굴 자랑하려 피는 게 아니구나

남 보기 좋으라고 피는 게 아니구나

봄 와서 몸 더워지니 못 견뎌 피는구나

꽃이든 사람이든 바위든 그 무엇이든

진짜 예쁜 것들은 나대지 않는구나

조용히, 그저 조용히 웃기만 하는구나

 

「터널을 지나며」(2020, 책만드는집)

 

 


 

 

홍사성 시인 / 성자의 길

 

살아서는

논매고 밭 갈고

등짐 나르고 달구지 끌고

자식도 몇 남 몇 녀씩 낳아 기르고

 

죽어서는

피와 살을 내놓고

뼈는 사골국으로 끓이고

가죽은 구두와 가방 만들게 하고

 

부처와 예수도 걷지 않은 길

마른 눈물 참으며

혼자 걸어간 소보다 더 소 같있던

 

눈뜨고 보면 절망

눈감고 생각하면 또 그리운

아버지

 

-시집 터널을 지나며에서-

 

 


 

 

홍사성 시인 / 몸을 철학해보니

 

 

몸이 전부다

 

몸이 있어 숨쉬고 몸이 있어 일하고 몸이 있어 사랑하는 거다 그래서 몸에 충성하는 거다 몸을 우습게 보지 마라 몸한테 잘 보이려고 옷 입고 몸 배고프지 말라고 밥 먹고 몸 쉬게 하려고 집 짓는 거다 그래서 악착같이 돈 벌려고 하는 거다

 

몸이 있으니 살아 있는 거다, 몸이 전부다

 

 


 

 

홍사성 시인 / 발바닥

 

 

"맨 밑바닥이라고 무시하지 마세요

 

발뒤꿈치만도 못하다는 말 함부로 하지 마세요

 

아무리 구척장사라도 발바닥 아니면 일어설 수 없지요

 

상처 난 발바닥에 약 바르다 한마디 들은 말입니다."

 

 


 

 

홍사성 시인 / 마지막 정찬

 

 

당신 사랑을 독차지해서 좋아요

당뇨로 한쪽 발목 자르도록 혼자 밥 먹게 한 게 미안해 일찍 들어갔더니 날마다 식단 바꿔가며 정찬 차려내더란다

다 먹지도 못할 걸 왜 억지 고생이야

안쓰러운 마음에 핀잔 줘도 호박꽃처럼 웃기만 하더니 함박눈 쏟아지던 어느 날 그 웃음 남겨놓고 눈 감더란다

내자도 떠날 걸 알고 있었던 말이지

그런 것 같아 매일 이별 밥상을 차렸던 게 아닌가 싶어 그러니까 몇 달간은 늘 마지막 밥상을 받은 셈이지

혹시 화장실 가서 몰래 웃는 거 아녀

누가 위로랍시고 객쩍은 농담 꺼냈지만, 사내들은 술청 밖으로 고개 돌리고 술잔만 들었다 놨다 하다 일어섰다

 

 


 

 

홍사성 시인 / 고물자동차

 

 

언제부턴가 자동차가 이상하다

벨트를 교환하면 오일이 새고/ 시동을 걸 때마다 엔진이 켁켁댄다

가끔씩 타이어도 펑크다

정비사 말로는/ 연식이 오래되면 다 그렇단다

폐차할 때는 아니니 고쳐가며 타란다

 

 


 

 

홍사성 시인 / 불사

 

 

김천 직지사는 중창불사를 하면서

부처님 법문 들을 때 올라가는 황학루를

약간 비껴 지었다 합니다

하필이면 누각 지을 자리에

못생긴 개살구나무 한그루가 있었는데

그 나무 살리려고 그랬다 합니다

쓸모없다고 베어내자는 사람 여럿이었으나

주지스님이 고집을 부려 할 수 없이

비뚜름하게 지었다 합니다.

 

 


 

홍사성 시인

강원 강릉 출생.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졸업. 2007년 《시와 시학》으로 등단. 불교신문 주필, 불교평론 주간, 불교 TV 제작국장, 불교방송 상무 등을 역임. 2018년 11월 단시조 담은 신작 시집 ‘고마운 아침’ 출간. 저서로는 시집으로 『내년에 사는 법』(책만드는 집, 2011)와 그밖의 저서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다』외 다수 있음. 현재 월간 『유심』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