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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길나 시인 / 비빔 밥, 섞임과 당김의 방식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5. 18.

김길나 시인 / 비빔 밥, 섞임과 당김의 방식

 

 

어제와 오늘의 교합인 나는 겨울로 깊어져 있다

가버린 나와 아직 오지 않은 나를 교접 중인 나는

시간에 주름 잡혀 장식 없이 진행될 것이다

어제의 그릇에 오늘의 밥을 퍼서 먹는 일이 이어진다

당신 앞에서 내 존재는 완료 정지되지 못했으므로

정지시킨 생물들을 섞어 오늘을 비비는 비빔밥의

역설은 감미료 없이 짜다

삶이 맵다는 직설은 붉은빛을 덮는 감정들 사이에서

오늘로 넘어오고

비빔밥의 덕목이란 고유 주석을 달고

눈물샘을 자극하는 고추장의 발효 비법이

내일로 넘어간다

 

*

아기를 대신해 아기울음을 울어주는 고양이가 햇발에

애기똥풀을 섞어 꿈밖으로 토설한 투명 실크 직조물은

숄처럼 두르기에 좋다

숄을 걸친 오후의 졸음이 이어지고

그리고는 시간이 역 주행한 오전 9시에서

불쑥 터진 전화벨에 졸음을 떠나 국경 밖으로 나가는

내 목소리, 얼굴을 하이델베르크에 두고 외출한 친구와

깜박깜박 반딧불처럼 깜박거리는 시간에

주름을 섞고

주름 속에서 펼쳐지는 강물을 조금 흘리며

강줄기를 섞고

여기서 저기를 당기고

먼 거리가 당김과 섞임의 형식으로 모자이크 되어갔다

잠시 함께 비빈 비빔밥이 다 먹혔으므로

두 목소리는 헤어졌다

 

너머로 온전히 당겨지고 넘겨지기까지 나는 당분간

섞임과 당김 방식으로 주름 잡힌 채 진행될 전망이다

 

「다층」2016년 겨울호

 

 


 

 

김길나 시인 / 산수유 아래서 징소리를

 

        그녀의 맨발을 만져보고 싶었으나

        그녀는 일찍이 땅 속으로 내려갔다

        그녀가 묻힌 흙에서 빠끔히 떡잎이 눈 뜨고

        떡잎에 숨은 길 한 가닥이 불쑥 일어나

        줄기는 허공을 주욱 찢어 올리고

        가지들은 또 낭창낭창 허공을 건드리고

        허(虛)를 찔린 허공이 여기저기서 째지고

        째진 공(空)의 틈새에서 얼굴 하나씩이 피어나고

        이렇게 수많은 그녀가 그녀의 맨발에서 솟아났다

 

        파르르 떨리는 허공의 틈새마다에서

        울려나오는 저 소리는 번쩍이는 징소리

        그리고 연달아 징을 치는 쟁쟁한 해 뭉치

        공을 트고 나온 얼굴들을 푸르게 두들겨 펴는.

 

 


 

 

김길나 시인 / 석류를 쪼갠다

 

 

석류를 쪼갠다

석류 알이 붉다

붉은빛 안에

알알이 두근거림이 들어 있다

석류 알을 베어 문 네 입술이 붉다

네 입술의 붉은빛 안에

살을 포 떠 살을 섞는 떨림이 들어 있다

고요를 붙들고 경련하는 천둥이

너와 나의 붉은빛을 쪼갠다

 

 


 

김길나 시인

1940년 전남 순천에서 출생. 1995년 시집 <새벽 날개>를 상자하면서 시단에 나왔으며, 1996년『문학과사회』가을호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빠지지 않는 반지』(문학과지성사, 1997)와  『둥근 밀떡에 뜨는 해』(문학과지성사, 2003) 와  『홀소리 여행』, 『일탈의 순간』가 있음. 산문집『잃어버린 꽃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