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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우 시인 / 뿔에 대한 우울
연필 깎아 필통 속에 나란히 세우고 닳은 지우개 하나 넣는다 내일 모레 글피를 그렇게 준비하던 아홉 살 쓸 것도 지울 것도 많으리란 걸 알았을까 연필 끝에서 돋아나던 내 이름 몸속에 불 하나 가지고 싶었는지 몰라 연필촉 뾰족하게 갈던 정갈한 숨결 하루에도 몇 번씩 부러지는 연필심 하루에도 몇 번씩 촉을 세우던 오롯한 자만은 한 자루 미루나무로 자랐지 다 어디로 흘러갔을까 미루나무에 파도치던 꿈의 등비늘 쓰레기통 뒤지는 도심의 들고양이처럼 살아내라 살아내라 살아내라 손톱만 길어나고, 발톱만 길어나고
툭, 무릎 위로 떨어지는 뿔 하나 몽당연필 같은 이름 하나
김수우 시집 『당신의 옹이에 옷을 건다』,《시와시학사》에서
김수우 시인 / 내 속의 아프리카
언제부턴가 내 옆에는 커다란 코끼리가 살고 있다 햇빛 좋은 날에는 사막능선으로 따라다니고 안개 깊은 날은 보일 듯 말 듯 오아시스로 머물곤 했다 사하라의 새벽이라고 이름하다가 그냥 내버려두었다
해가 석류알로 뚝 떨어지던 등짝에는 풀씨들이 날아 왔다 연한 손가락 내밀다가 하릴없이 바람을 따라갔다 속사랑이 주름 많은 두 귀로 자라는 동안 회색 살갗으로 두꺼워지는 견고한 절망, 살갗을 뚫고 긴 이빨로 뻗어나는 열망은 차라리 모래산을 끌고 사막을 넘는 바람이었다
시시로 가슴팍에 우물 같은 발자국을 내었다 두개골 속에도 들어오고 쓸개 속에도 들어오더니 가끔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당황해서 둘러보면 어김없이 반대쪽에서 천천히 걸어왔다
착하고 슬프고 엄한, 코끼리의 눈!
- 김수우 시집 < 당신의 옹이에 옷을 건다 >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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