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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광렬 시인 / 걸레
지금은 부도 난 모 중소기업 창립 기념품으로 받은 수건. 얼핏 툇마루에 뭉쳐져 있는 그 모양새,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겨준 뒤 곤해하는 예수 같다 터진 실밥 뭉치는 움푹 들어간 눈, 희미해진 ‘축 창립 10주년……’은 덥수룩 턱수염
빨려고 집어 드니 안쓰럽다 잡범들과 나란히 십자가에 못 박혔던 神. 제 손으로 못 하나 베대로 못 빼던 神. 부활해야 하나 한 5백 년 푹 쉬고 싶은, 발등에 고비의 황사가 쌓이어도 다시는 제자들 발을 씻겨 주지 않을
하지만 천생 예수, 두드릴 문도 없이 사시는 칠곡 황토 초가의 외당숙 같은, 궂은 일 도맡아 젖은 손 마를 길 없는 머슴 출신의
구광렬, 『슬프다 할 뻔했다』 ,문학과 지성사 , 2013, 38쪽
구광렬 시인 / 까만 올리브
사진작가 제임스 레이놀즈는 사행 집행 전 사행수들이 선택한 최후의 만찬을 찍었다
프렌치프라이와 치킨, 밀크셰이크 세트 바나나, 파인애플, 사과, 포도, 망고 세트 달걀과 쿠키,커피 한 잔 세트 콜라와 비스킷, 하겐다즈 아이스크림 한 통 세트 식사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성냥과 담배 한 갑 세트
그중 눈길을 끄는 건 아직은 뺨이 빨간 어린 소녀들을 강간 살해한 로버트 빌이 선택한, 38구경 권총 알을 닮은 씨를 뺀 올리브 한 알
그 씨가 빠진 한 알로 저승에서 올리브나무를 싹 틔우려 했을까? 두 알이었다면 대장을 거쳐 항문으로 빠져나왔을까?
오렌지색 식판 중앙에 놓인 까만 올리브, 좀더 멀리 놓고 보니 그 한 알, 속이 꽉 찬 씨앗처럼 보인다 밀레의 「만종」속, 가난한 농부 부부의 손바닥 위, 밀알을 닮은
그다음 날 아침, 빌이 전기의자에 앉기까지 그 한 알, 식도를 타고 소장까지 밀려와선 뚝, 그 자리에 멈췄으면………
구광렬 시인 / 설날 동대구역에서
입석(立席)은 서서 가는 게 아니다 구겨져 가는 것이다 다른 그림자가 내 그림자를 휘감아버리지 않게, 몸속에 구겨 넣는 것이다
좌석(座席)이란 것도 그렇다 잠시 무릎을 접을 뿐이다 의자 부피만큼만 자신의 그림자를 깔고 앉을 뿐이다
다음에 내릴 역은 모질다 겨울비 내릴 땐 더 그렇다 저수지에서 익사한 성환이, 덤프트럭 타이어에 휘감긴 민호, 도루코로 동맥을 끊은 창수 때문은 아니다 열일곱, 열아홉, 스물, 걔 셋 죽었을 때 합한 나이보다 더 살고 있는 나 때문도 아니다
아무도 마중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달맞이꽃 한 송이도, 개 한 마리도……
아니, 역이란 게 그렇지 않나 뻥 뚫린 역사 위로 눈 올 날 비 내리면, 서로 만나서는 안 될 철로가 반짝이니까 플랫폼 안에선 비밀보다 더 비밀스런 시치미가 궁리 되니까
입석으로 올 때나, 좌석으로 올 때나, 그림자를 두고 내리는 건 마찬가지다 두고 내릴 그림자도 없는 녀석들 때문이 아니다 구겨서라도 들어갈, 깔려서라도 함께할, 제 살점과 뼈다귀를 찾고 있을 그 그림자들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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