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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보영 시인 / 술 담그는 놈
놈이 술을 담근다. 놈은 시간이 미워서 술을 담갔다. 놈은 술을 즐기지 않으면서 술을 담근다. 놈이 담그는 술은 와인이다. 술을 쏟으면 바닥이 보여서 놈은 술을 담근다고 말하고서, 술을 쏟으면 바닥이 생겨서 술을 담근다고 말을 바꾼다. 나는 바닥이 재미있다. 바닥을 치는 술을 담그는 놈도 좋다. 놈이 담그는 술은 와인인가. 기다릴수록 맛있어지는 게 괘씸해서 놈이 술을 담근다. 오래 두고 볼수록 멋있어지는 건 세상에 술밖에 없어서 놈이 술을 담근다. 술을 쏟으면 바닥이 바닥을 치는 게 보인다고 놈은 재밌어 한다. 놈을 본다. 빛을 좋아해서 바닥에 잘 눕는 놈을. 이 글은 술에 관한 상징이 아니다. 상징은 모두 구라니까. 비둘기가 평화의 상징이라면 사람들이 비둘기를 피해 다닐 리 없기 때문에 놈이 술을 담근다. 앉을 수도 걸을 수도 없게 고정되었으면서 바닥에는 잘 눕는다. 놈은 오래 전에 관절을 없애버렸다. 관절이 없으면 기댈 수 없어서 좋다고 놈이 말한다. 사람에게 기대면 안 돼, 기대면 추락해, 엘리베이터가 내게 가르쳐주었다. 시간이 간다. 술은 맛있어지고 놈은 달콤한가. 시간의 껍데기를 깐다. 아무것도 안 하고 놈은 서 있다. 아무것도 안 하기 때문에 너는 성의가 있다. 성실한 너는 술을 담근다. 상처를 입을 수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바닥이 그런 말을 하면 못 쓴다. 술을 담그는 사람은 무섭고 외로운 인간이다.
문보영 시인 / 오리털 파카신
신이 거대한 오리털 파카를 입고 있다 인간은 오리털 파카에 갇힌 무수한 오리털들, 이라고 시인은 쓴다 이따금 오리털이 삐져나오면 신은 삐져나온 오리털을 무신경하게 뽑아 버린다 사람들은 그것을 죽음이라고 말한다 오리털 하나가 뽑혔다 그 사람은 죽었다 오리털 하나가 뽑혔다 그사람이 세상을 떴다 오리털 하나가 뽑혔다 그 사람의 숨통이 끊겼다 오리털 하나가 뽑혔다 그 사람이 사라졌다 죽음 이후에는 천국도 지옥도 없으며 천사와 악마도 없고 단지 한 가닥의 오리털이 허공에서 미묘하게 흔들리다 바닥에 내려앉는다, 고 시인은 썼다
문보영 시인 / 벽
벽을 앓는 모든 것은 집이 된다. 벽에 중독된 모든 것은 벽이 된다. 누구나 벽으로 태어나 벽으로 살다가 벽으로 죽듯 벽은 반복되고 벽은 난데없다. “꽃이 펴도 당신을 잊은 적 없습니다.” 이런 문장은 위로조로 읽어야 할까 공포조로 읽어야 할까. 벽은 쓰러진 측백나무와 대답 없는 편지를 좋아해. 아니, 쓰러진 측백나무와 대답 없는 편지를 좋아하는 것은 벽. 벽을 뚫으면 벽이 딸려 나오고. 세상 모든 문장의 종지부와 벽은 또 어떻게 다를까? 봄이 개과천선한들 봄은 봄이듯 멀리 있는 모든 것은 벽. 하나의 벽은 다른 벽을 해명하는 데 일생을 걸지만. 벽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고. 아니,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것은 벽. 벽은 의도가 없고. 벽은 간이 붓고 싶고. 벽은 늘 위독해. 벽은 믿을 수 있는 만큼 아프고 믿을 수 있는 만큼 헤어진다. 벽은 언제나 넘치거나 모자라다. 벽이 벽을 실토하는 사이 벽은 어디로 갔나? 벽은 벽을 벗어도 벽이 되었다.
문보영 시인 / 불면
누워서 나는 내 옆얼굴을 바라보고 있다 내 옆의 새벽 2시는 회색 담요를 말고 먼저 잠들었다
이불 밖으로 살짝 나온 내 발이 다른 이의 발이었으면 좋겠다
애인은 내 죽음 앞에서도 참 건강했는데
나는 내 옆얼굴에 기대서 잠을 청한다 옆얼굴을 베고 잠을 잔다 꿈속에서도 수년에 걸쳐 감기에 걸렸지만 나는 여전히 내 발바닥 위에 서 있었다 발바닥을 꾹 누르며
그만큼의 바닥 위에서 가로등처럼 휘어지며
이불을 덮어도 집요하게 밝아 오는 아침이 있어서
부탄가스를 흡입하듯 옆모습이 누군가의 옆모습을 빨아들이다가
여전히 누군가 죽었다 잘 깎아 놓은 사과처럼 정갈하게
문보영 시인 / 책기둥
도서관에 간다. 밖에서 볼 땐 가로로 긴 직사각형이나 들어가면 첨탑이다. 높은 벽은 거대한 스테인드 글라스 창을 달았다. 너무 큰 창은 벽을 약하게 하며 창은 지나가는 것을 모두 수긍해 버린다는 나의 생각이 틀렸다고, 도서관 사서인 에드몽 자베스는 말한다.
에드몽이 쓴 글라스의 왼쪽 알에 달린 얇은 줄이 어깨까지 드리운다. 이곳은 천장이 아주 높다. 생각하자 책을 높이 쌓아야 하니까, 에드몽이 대답한다. 그는 램프의 뚜껑을 열어 기름을 채운 뒤 촛불을 켠다.
서가에는 책만이 있다. 책은 기둥 모양으로 쌓여 있다. 그 주변을 난쟁이들이 서성인다. 난쟁이들은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가로로 비틀어 책의 제목을 살핀다. 책기둥의 가장 아래쪽을 살핀다. 읽고 싶은 책은 늘 기둥의 가장 아래쪽에 있다. 나는 읽고 싶은 책을 머릿속으로 떠올린다. 그러자 그 책은 기둥의 가장 아래에 위치한다.
책기둥들은 어디론가 기울었다. 나는 기울어진 건물을 떠올린다. 피사의 사탑과 같이 똑바로 서지 못한 것들에 사람들은 환호한다.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것이 주는 감동은 책기둥이 주는 그것과 유사하다. 기우는 것은 어디론가 편향되니까. 겉은 꼿꼿하나 안은 어디론가 치우친 인간의 몸을 떠올린다. 심장은 왼쪽으로, 간은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으므로 사람은 똑바로 걷는다. 기울어진 건물은 내부에 벽으로 치우쳐 자는 사람을 기른다, 는 내 생각을 읽은 에드몽이 나 대신 내 생각을 말한다.
그는 지팡이로 바닥에 널브러진 장서들을 옆으로 치우며 길을 만든다. 이따금 난쟁이들의 숱 없는 작은 머리를 지팡이로 내려친다. 난쟁이들이 독서에 집중하지 않아서, 라고 말하는 그는, 책기둥에 등을 대고 앉아 책에 푹 빠진 난쟁이들만을 골라 때린다.
난쟁이들이 책기둥을 무너뜨리고 원하는 책을 얻는다. 다시 기둥을 쌓는다. 난쟁이들은 책을 때리고 책을 향해 침을 뱉고 욕설을 퍼붓는다. 그럴 만도 하다, 고 나는 생각한다. 책은 무례하니까. 책은 사랑을 앗아 가며 어디론가 사람을 치우치게 하니까. 벽만 바라봐서 벽을 약하게 만드니까. 벽에 창문을 뚫고 기어이 바깥을 넘보게 만드니까.
난쟁이들은 맨 아래 깔린 책을 얻기 위해 기둥을 무너뜨린다. 책을 쌓여 기둥이 된다. 기운다. 치우친다. 쏟아진다. 다시 쌓인다. 맨 아래 깔린 책을 읽으면 그 위에 쌓인 모든 책을 다 읽은 거나 다름없다고, 그 한 권의 책은 그 위에 쌓인 책들을 집약한다, 는 나의 생각이 안일하다고 에드몽은 꾸짖는다. 햇살이, 몇 가닥 되지 않는 얇고 구불구불한 난쟁이들의 머리칼에서 반짝인다. 빛이 그들의 오래된 생각을 때린다. 난쟁이들은 이제 지친 게 아니겠냐고 생각하는 내가 아직 책을 덜 읽었다, 고 에드몽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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