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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나석중 시인 / 성냥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12.

나석중 시인 / 성냥

 

 

우중충한 봄날

언제 어느 개업 집에서 가져온

작은 성냥 곽 하나를 열어 본다

그간 소지(燒紙)에나 쓰고 남은

몇 알의 성냥개비들

참새 주둥이같이 짹짹거린다

꽃을 품고 얼마나 목이 탔으랴

저들은 활활 태워줌으로 다시 사는 것

서슴없이 한 개비 그어대는 순간

"살았다!" 소리치며 환생하는 불꽃

피난 시절 고향 냄새 같은 유황 냄새

징 울음처럼 길게 이명(耳鳴) 하나 남기는데

정작 누가 다비(茶毘) 같은

내 몸 깡마른 성냥개비를 그어대랴

우중충한 봄날.

 

-시집 『나는 그대를 쓰네』

 

 


 

 

나석중 시인 / 가을 밤

 

 

뒤떨어진

철새 한 마리

찬 바람에 울고 가네

 

맥없이 지는 달에

제 울음에 복받쳐

풍선처럼 울음소리 커지고

 

몸 둘 곳 없는

낙엽 같은 나그네

뜬 시름 깊어지는데

 

애타는

풀벌레 소리

잠들 줄을 모르네.

 

- 첫시집 『숨소리』

 

 


 

 

나석중 시인 / 나는 그대를 쓰네

 

 

산은 산이요

나무는 나무이듯이

그대를 보고 듣는 대로 받아 적네

그대의 말씀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읽어 좋은 그대만을 나는 매일 읽네

윤기나는 머리와 눈의 총기는 보이지 않아도

숲 속의 새가 보이지 않아도

그냥 지저귀는 소리만으로도 신기하네

수수깡같이 마른 그대는

잘못 하면 죽을 병 하나 갖고 있는데

늦겨울 시누대처럼 비릿하고 달큼하고 서글프네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것은

두 줄기 뱀의 혓바닥처럼 예민하고

부르르 떠는 악어의 옆구리처럼 절실하네

절실하여

나는 자꾸 떠나려는 그대를 쓸 수밖에 없네

몸을 씻고

청승맞게 나 그대를 쓰네

옥같이 조촐하고 우물처럼 깊은 밤에

 

 


 

 

나석중 시인 / 이명(耳鳴)

 

 

내 고향 김제 땅

앞산 울창한 소나무숲을 돌아서

두어 뱀 논배미를 건너서

문풍지에 와서 울던 자욱한 바람소리가

여기 수백 리를 달려와

지금 귀청에 잉잉거리는데

들리는 그 소리는 수십 년 전의 바람소리

들리던 바람소리는 왜

늙지 않고 젊은 채로 귀청에 감기나

왜 경칩도 오기도 전에

눈 뜨자마자 정분 난 개구리 소리 와글와글 들리는가

모두 죽지 않고

한겨울 잘 보냈다고 시끌버끌

 

 


 

 

나석중 시인 / 촉감

 

 

내 잠을 스쳐가는 빗소리

앞마당 묵은 살구나무가

머리를 감고 있다

 

옷을 벗고 마당에 나와

맨몸으로

가뭄 끝 단비를 맞는다

누군가 헝클어진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차디찬 볼을 핥아주던

따뜻한 염소 혓바닥

한밤중에 와 닿는

비의 손끝

 

이 달디 단 입맞춤을

사랑에 주린 사람이 아니면

알지 못하리라

 

 


 

나석중(羅石重) 시인

1938년 전북 김제 출생. 아호: 송재(松齋). 이리농림고등학교 졸업. 2004년 월간 『신문예』 신인상으로 등단. 2005년 시집『숨소리』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목마른 돌』,『외로움에게 미안하다』,『풀꽃독경』,『물의 혀』,『촉감』『나는 그대를 쓰네』,『숨소리』와 미니시집(전자)『추자도 연가』, 디카시집(전자) 『라떼』,『그리움의 거리』가 있음. 김제문협 회원.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원. 석맥회(石脈會)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