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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석중 시인 / 성냥
우중충한 봄날 언제 어느 개업 집에서 가져온 작은 성냥 곽 하나를 열어 본다 그간 소지(燒紙)에나 쓰고 남은 몇 알의 성냥개비들 참새 주둥이같이 짹짹거린다 꽃을 품고 얼마나 목이 탔으랴 저들은 활활 태워줌으로 다시 사는 것 서슴없이 한 개비 그어대는 순간 "살았다!" 소리치며 환생하는 불꽃 피난 시절 고향 냄새 같은 유황 냄새 징 울음처럼 길게 이명(耳鳴) 하나 남기는데 정작 누가 다비(茶毘) 같은 내 몸 깡마른 성냥개비를 그어대랴 우중충한 봄날.
-시집 『나는 그대를 쓰네』
나석중 시인 / 가을 밤
뒤떨어진 철새 한 마리 찬 바람에 울고 가네
맥없이 지는 달에 제 울음에 복받쳐 풍선처럼 울음소리 커지고
몸 둘 곳 없는 낙엽 같은 나그네 뜬 시름 깊어지는데
애타는 풀벌레 소리 잠들 줄을 모르네.
- 첫시집 『숨소리』
나석중 시인 / 나는 그대를 쓰네
산은 산이요 나무는 나무이듯이 그대를 보고 듣는 대로 받아 적네 그대의 말씀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읽어 좋은 그대만을 나는 매일 읽네 윤기나는 머리와 눈의 총기는 보이지 않아도 숲 속의 새가 보이지 않아도 그냥 지저귀는 소리만으로도 신기하네 수수깡같이 마른 그대는 잘못 하면 죽을 병 하나 갖고 있는데 늦겨울 시누대처럼 비릿하고 달큼하고 서글프네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것은 두 줄기 뱀의 혓바닥처럼 예민하고 부르르 떠는 악어의 옆구리처럼 절실하네 절실하여 나는 자꾸 떠나려는 그대를 쓸 수밖에 없네 몸을 씻고 청승맞게 나 그대를 쓰네 옥같이 조촐하고 우물처럼 깊은 밤에
나석중 시인 / 이명(耳鳴)
내 고향 김제 땅 앞산 울창한 소나무숲을 돌아서 두어 뱀 논배미를 건너서 문풍지에 와서 울던 자욱한 바람소리가 여기 수백 리를 달려와 지금 귀청에 잉잉거리는데 들리는 그 소리는 수십 년 전의 바람소리 들리던 바람소리는 왜 늙지 않고 젊은 채로 귀청에 감기나 왜 경칩도 오기도 전에 눈 뜨자마자 정분 난 개구리 소리 와글와글 들리는가 모두 죽지 않고 한겨울 잘 보냈다고 시끌버끌
나석중 시인 / 촉감
내 잠을 스쳐가는 빗소리 앞마당 묵은 살구나무가 머리를 감고 있다
옷을 벗고 마당에 나와 맨몸으로 가뭄 끝 단비를 맞는다 누군가 헝클어진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차디찬 볼을 핥아주던 따뜻한 염소 혓바닥 한밤중에 와 닿는 비의 손끝
이 달디 단 입맞춤을 사랑에 주린 사람이 아니면 알지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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