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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노태맹 시인 / 碧巖錄을 읽다. 9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12.

노태맹 시인 / 碧巖錄을 읽다. 9

 

 

1.

푸른 용이 사는 붉은 동굴을

몇 번이나 그 괴로움으로 내려갔다 왔느냐.

입에 달고 다닐 달달한 주문이 필요하다면

옛다,

일면불(日面佛) 월면불(月面佛).

 

2.

바다 위에 뜬 해는 가슴에 안고

강 물 위에 뜬 달은 상징의 둥근 입이 삼켰다.

커다란 뱀 구불구불 미끈거리는 물의 시간을 헤엄치고

이제 이 허구의 고통마저 가슴 뜨겁다 한다면

옛다,

일면불(日面佛) 월면불(月面佛).

 

3.

봄부터 할매는 전동스쿠터를 타고 와서 불편한 다리로 상추, 고추, 들깨, 가지, 옥수수, 호박, 배추 등등을 땅에서부터 파 내 올렸다. 지금은 키 큰 들깨가 무성히 서서 단단히 익은 햇빛의 시간들이 고통으로부터 탈탈 털리길 기다리고 있다. 난 그것을 봄 여름 가을의 살구나무 그늘에서 보았고, 지금은 할매가 살구나무 아래에서 달을 올려다보고 있는 중이다.

 

어쩌면 할매가 알지도 모르겠다,

쭈글쭈글한, 저 일면불(日面佛) 월면불(月面佛).

 

 


 

 

노태맹 시인 / 흰 나비 도로를 가로지르고

 

 

지하 주차장에 가득찬

비발디의 <세상에 참 평화 없어라>에

차 문을 열다 잠시 감전된 듯 멈추다.

 

성서 공단을 지나고 하수 처리장 돌아,

작은 메타세쿼이아 숲가에 차를 세우고

부정맥으로 일렁거리는 내 안의 강물들을 진정시켜 보다.

 

꽃 핀 자귀나무 위 공기들이

붉은 부채꼴 모양으로 둥글게 말렸다 닫히고

새 떼들의 울음을 덮는 환한 나무 그늘.

 

혹은 천천히 도로를 가로지르는 흰 나비 한 마리......

 

하지만 우리 생은 이런 아름다운 내러티브가 아니지.

지나온 속도보다 더 빠른 속도로

붉은 구름들이 도로를 따라 가고

 

이 길 위에서의 내 전망이란

길바닥 붉은 살덩이가 눌러 붙어 있는 계급론

나비 한 마리를 휙 허공으로 날려버리는 공황론 같은 것.

 

술이 다 깰 때 까지 참 평화는 오지 않을 것이고

그럼에도 생이란 내 차가 지나간 그 길 위

다시 천,천,히, 도로를 가로지르는

한 마리 흰 나비 같은 것일 것인가, 어쩔 것인가.

 

 


 

 

노태맹 시인 / 百日紅은 사막이다

 

 

모든 꽃 핀 곳은 나의 사막이다.

 

사랑이여, 百日 동안만 나는 너를 허락하느니 붉음이 나의 기도를 불태우고 석양이 이 뜨거움을 가라앉힐 때 까지 이 사막을 견디게 해 다오. 희망은 모래 언덕처럼 흘러가 버리고 사람들은 물 마른 강 가에 서서 신기루 같은 집들을 세우고 또 허무느니 오직 이 삶을 견디는 것만으로도 나의 補贖(보속)은 이루어지겠느냐. 사랑이여, 百日 동안만 나를 너에게 허락하느니 百日紅 나무 아래 낙타가 지평선 다 뜯어 먹고 고개 돌려 제 등을 바라보는 그런 눈빛으로 나를 붉게 뒤돌아보라.

 

오, 모든 꽃 핀 곳은 너의 사막이다.

 

 


 

 

노태맹 시인 / 겨울산을 듣다

 

 

은빛 물소리 그치고

산새들 밭은 울음소리만

마른 등걸 속에서 들립니다.

당신이 원하신 대로

 

모든 소리 얇은 살얼음처럼 가벼워져

이제 저 마른 등걸

내 겹겹의 울음도 읽으십시오.

 

다섯 개의 해가 뜨고,

어쩔 줄 몰라 구불구불 금빛 가지와 꽃들을 뱉어내던

지난 계절의 나무들도 이제는

바람에 가깝습니다.

이제 더 무엇을 들려주시렵니까.

 

恐慌처럼 회색 꺽지들

온 입을 벌리고 계곡 위에 떠 있습니다.

그들의 앙 못 다문 자음과

당신의 텅 빈 모음이 만나 흰 눈이라도 내리려는지요.

 

못 다한 사랑은 이 겨울산에 버립니다.

 

은빛 물소리 그치고,

겨울산만 겨울산을 듣고 있는 이 바람의 나날들

오래도록 쓸쓸하지만은 않겠지요.

나의 敵

나의 資本

모든 계절의 流通인, 당신.

 

 


 

 

노태맹 시인 / 흰 무꽃을 보다

 

 

깍두기 하려고 천 원 주고 두 개 사온 무가 베란다 구석에 저 혼자 처박혀 있다가 쭈글쭈글한 몸통에 푸른 줄기 세우고 흰 꽃도 제법 피워내고 있다. 장하다, 말해도 좋을까, 나비도 햇빛도 없는 지옥에서 읽는 흙 없는 뿌리의 辯神論, 혹은 어쩌지 못하여 터지는 性慾의 흰 폭죽 같은.

 

色色空空環復空

空空色色中無盡

 

아흔일곱 살 할머니가 눈이 멀지는 않겠느냐고 들리지 않는 귀로 고래고래 고함을 치고 나가버린 진료실. 의자에 앉아있는 이 삐삐 마른 몸의 허깨비. 몇 년을 더 살아야 나는 生으로부터 용서가 될까. 뿌리째 썩어버린 蘭, 누군가의 발길에 깨져 버리는 빈 화분, 이 검은 救援論.

 

色色空空環復空

空空色色中無盡

 

흰 무꽃들이 지고 있다. 어디까지 나는 가보고 싶어해도 좋을까. 어차피 꽃이 진들 내 어찌 내 앎을 모르고 내 모름을 알겠는가. 눈물겨운 落花, 落花, 떠다니는, 이 허기진 낮술의 飛紋같은.

 

 


 

노태맹 시인

1962년 경남 창녕에서 출생. 계명대학교 철학과 수료. 1990년 《문예중앙》 신인상에 〈유리에 가면〉 외 4편의 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유리에 가서 불탄다』 (세계사, 1990)와『푸른 염소를 부르다』(만인사, 2008)가 있음. '오늘의 詩'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