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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강 시인 / 네가 잠든 동안
드문드문 너를 보는 일 그리워하는 일 유행이 지난 일
모두가 퇴근한 신문사 빌딩의 한 구석에서 너는 신문을 오려 붙이고 있었지만 그것은 취미가 아니라 밥벌이라고 말했던 일 신기하게도 스탠드 빛이 너의 구역 내에만 머물던 일
아직도 그런 일이 밥벌이가 되느냐 묻자 신기하게도 아직은 그렇다고 말하던 일
너의 큰 키를 가늠해 본 적 없지만 너는 더 자랄 것 같았고 좁은 구역에 쏟아지는 조명이 뜨거워 보이기도 했는데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나 묻지 않았지 그 뜨겁고 차가운 곳에 머물 수 있는 것을
너는 읽다 만 책을 펼친 채로 엎어 두고 그 옆에서 엎드린 채 잠이 들어
내가 오는 줄도 가는 줄도 모르고 시계가 고장 난 것도 모르고 세상이 끝난 것도 모르고
엎드린 채로 영영 자라고 있다
너는 길게 구부러진 마디들이 되고 공룡의 뼈처럼 거대해지고 규칙적으로 호흡하며 성벽들을 무너뜨리고 있다 엎드린 채로
네가 잠든 동안 네가 잠든 동안
김이강 시인 / 기우
이해할 수 없는 여름이었다. 여행지 도로에 운동화 바닥이 녹아서 눌어붙은 일. 그것이 남긴 발자국들이 과자처럼 길을 안내해 준 일. 결국에는 지나가는 버스에 올라타서 잠이 든 일.
부두에 앉았을 때 당신은 그 낡은 운동화 한 짝을 테트라포드 틈의 어둠 속으로 밀어 넣게 된다. 그사이 태양이 수평선 아래로 가라앉았는데 그것은 저 아래로 무엇인가 다시 솟아오르고 있다는 뜻이었다.
뒤편에는 중년 부부가 개를 데리고 벤치에 앉아 있다. 아름다운 것은 왜 아름다운가. 당신이 한번 말해 봐. 당신이 좋아하는 것. 그런 법칙 말이야.
그러자 당신이 혼자서 중얼거리는 일. 혼자만, 그럴 수는, 없어. 방파제의 어둠을 향해 깊숙이 허리를 숙였을 때 희고 푸르게 드러난 당신의 등을 슬며시 밀어보고 싶었던 일. 걱정 마. 몇 시간 후엔 도심에 있는 타워로 가서 커피도 마시고 운동화도 사자.
얼마후에 우린 예정되었던 일처럼 비행기를 놓치게 되고 공항에서 여러 시간을 체류하게 된다. 그저 몇 시간일 뿐이었는데 여름이 자신의 꼬리를 감추며 몸을 웅크리고 있다.
김이강 시인 / 서늘한 식당에서
서늘한 식당에서 기다렸다 우리의 다음 책은 무엇일까 나는 네가 조금만 더 늦게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다 깨어난 네가 이곳으로 더 늦게 걸어오길 네가 오지 않는 동안 우리가 가진 모국어의 그늘이 책들 사이로 스며든다 모국어를 함께 쓴다는 것 차라리 모자를 함께 쓴다고 할까
서늘한 곳에서 나는 너를 기다리고 너의 모자를 기다리고 태양이 멀어지고 자전거가 지나가고 기다란 옷자락을 펄럭이는 일 기다란 생각 속에서 포크나 나이프가 접시에 부딪히는 일 소리들이 느릿느릿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일 이 식당은 꼭 흐린 꿈속 공간 같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데 모두가 대화하고 있어
나는 몸을 펴고 걸어 본다 서늘한 곳이 나를 기다린다 내가 돌아오기를 조금 늦게 오기를 기다릴까 종업원들은 나에게 자꾸만 물을 더 마시라고 말한다 물이 끝없이 우리를 기다릴지도 몰라 나는 물을 마시다 말고 찢어서 뭉쳐 놓은 생각 위에 뿌려 준다 너는 언젠가 자랄 거야
흐린 꿈속에서 헤매는 동안 너는 조금씩 선명해지고 우린 어쩌면 영영 만나지 못할 것이지만 오늘과 내일의 사이, 그런 것이 있다면 오늘과 내일을 모두 먹어 치워 버리고 말겠지 그러는 사이에서 너는 다시 흐려지면서 다가오는 것
늦어지는 사이에 이미 지나가 버렸던 것들이 창밖에서 반짝이고 있다 나는 네 몫의 식사를 주문해 놓는다
김이강 시인 / 태양이 밀려드는 바다
여려 겹의 꿈으로부터 여러 번 탈출에 성공한 내가 내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이번 것은 내 꿈이야. 나는 생각했지만 아무것도 통제할 수가 없었고. 검고 하얗고 고요한 너의 윤곽 안으로 한 번도 본 적 없는 무늬를 접었다가 펼친다. 태양이 밀려드는 바다. 너는 눈을 감는다. 나는 네가 노래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너의 목소리 속에서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발견해 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태양이 밀려드는 바다. 너는 말이 없고 너는 눈을 뜨지 않고 너는 자꾸만 내 주변을 맴돌아 붉게 물들이고 있다. 네가 밀려드는 바다. 그런 바다는 새롭게 쓰여지고 괴로운 역사처럼 거듭되지만
태양이 밀려드는 바다. 눈을 감으면 밀려들어 온다. 나는 이 꿈에서 탈출하지 않는다.
김이강 시인 / 우리의 숲은 끝나지 않는다
그해 여름에 우린 좋았어요 아무것도 오지 않았죠 비도 눈도, 매주 한 번씩 과일과 채소를 배달해 주던 사람도, 다음 주말엔 오겠다고 전활 걸어온 이모나 고모, 삼촌들도
깊은 곳도 아니었는데 우린 꼭 그 숲에 갇힌 사람들처럼 식량을 아끼고 전기를 아끼고 수도를 아끼며 지냈어요 아버지와 동생들이 산책을 나가고 나면 이제는 쓰임이 없는 우물 앞에 서서 당신과 난 꼭 물이 차오르진 않았나 확인을 했죠 그건 우물이 아니라 깊은 덫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우린 나중에 이야기했어요 보이지 않는 저 깊은 곳에서 우리가 본 적 없는 아름다운 동물들이 슬쓸히 죽어가고 있을지 모를
여름이 한창인데도 당신은 겨울을 걱정했어요 우리의 모든 것이 너무 얇지 않느냐고 나는 꼭 성인처럼 당신께 말했어요 무심해야 단단해질 수 있는 거예요. 아버지는 동생들과 돌아온 저녁이면 가방을 풀어 몇 가지 열매들을 꺼내 놓으며 그날 본 길들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북쪽의 자작나무 숲을 오랫동안 바라보면 길이 여러 갈래로 변하는 착시가 생긴다든지, 남쪽 관목 숲으로 난 길의 흔적은 바다 방향으로 흐른다든지, 그런 것들을 몰라도 우린 언제든 여기서 나갈 수 있다고 당신은 말하곤 했죠 아직은 모든 것이 남아 있는 여름
그 무엇인가 올 것도 같았는데 당신은 단지 비를 기다렸나요 전설처럼 이 숲에 남아 쓸쓸해지고 있다고 생각했나요
아버지가 오래 다듬어 놓았던 길로 걸어 나가서 수북한 식량들을 가지고 돌아왔을 때 생각했어요 기다리는 것은 오지 않는다고 모두가 단단해져 가는 동안 오로지 엷은 피부의 당신만이 이토록 수북하게 마음을 들여 이 여름을 연장하고 있다고
어느 날 꾼 꿈속에서 우물 속으로 들어간 당신은 비밀을 발견한 것처럼 저 깊은 바닥에서 외쳤죠 우리의 숲은 끝나지 않는 것이란다, 끝나지 않는 동안 숲이야. 잠에서 깨었을 때 처마에서는 고여 있던 빗물이 툭툭 떨어지고 있었어요
젖은 땅에 선 당신의 얼굴 좋았다고 이야기하게 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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