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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허민 시인 / 여의도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12.

허민 시인 / 여의도

 

 

그곳에서 오래전 우리는

같은 이야기가 다르게 쓰인

책 두 권을 서로 나누어 가졌다

하나는 남자의 이야기

또 하나는 여자의 이야기

가을, 겨울과 봄...

책을 천천히 읽어 나가는 동안 우리는 만났다

손을 잡았는지도 모르지

각자의 책을 읽고 나면

같은 이야기가 다르게 쓰인

그 책 두 권을 서로 바꾸어 보기로 했지

같은 계절과 같은 장소, 같이 만난 사람들이

서로 다르게 쓰여 있는 그 책을

우리가 서로 바꾸어 보았는지는

기억에 없다, 왜 사람들은

그들이 간직한

첫 번째 이야기만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책은 벌써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

불 타 사라졌거나, 혹은

깊은 창고에 갇힌 채 곰팡이가 슬어

어느 날 쓰레기더미와 함께 소멸했는지도 모르지

책은 사라졌지만

그때 내가 읽었던 처음 이야기는

불에 타고 재가 되어 흩어져도

세월 속 곰팡이꽃이 피었어도

여전히 꿈 속 페이지를 사납게 흔들며

영혼처럼 남은 생애를 떠돈다

나는 여전히 또 다른 한 권의 책

그 같지만 다른 이야기를 알지 못하고

알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한 권의

같지만 다른 책만을 읽고 또 읽으며

부질없는 밑줄을 그을 뿐

그것은 완전히 다른

똑같은 이야기

하여 벚꽃이 부서지고

그 아래 멈추지 않는 강물이

흐르고 흘렀던 것이다

 

웹진 『시인광장』 2021년 5월호 발표

 

 


 

허민(許旻) 시인

1983년 강원도 양구에서 출생.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4년 웹진 《시인광장》을 통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