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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민 시인 / 여의도
그곳에서 오래전 우리는 같은 이야기가 다르게 쓰인 책 두 권을 서로 나누어 가졌다 하나는 남자의 이야기 또 하나는 여자의 이야기 가을, 겨울과 봄... 책을 천천히 읽어 나가는 동안 우리는 만났다 손을 잡았는지도 모르지 각자의 책을 읽고 나면 같은 이야기가 다르게 쓰인 그 책 두 권을 서로 바꾸어 보기로 했지 같은 계절과 같은 장소, 같이 만난 사람들이 서로 다르게 쓰여 있는 그 책을 우리가 서로 바꾸어 보았는지는 기억에 없다, 왜 사람들은 그들이 간직한 첫 번째 이야기만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책은 벌써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 불 타 사라졌거나, 혹은 깊은 창고에 갇힌 채 곰팡이가 슬어 어느 날 쓰레기더미와 함께 소멸했는지도 모르지 책은 사라졌지만 그때 내가 읽었던 처음 이야기는 불에 타고 재가 되어 흩어져도 세월 속 곰팡이꽃이 피었어도 여전히 꿈 속 페이지를 사납게 흔들며 영혼처럼 남은 생애를 떠돈다 나는 여전히 또 다른 한 권의 책 그 같지만 다른 이야기를 알지 못하고 알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한 권의 같지만 다른 책만을 읽고 또 읽으며 부질없는 밑줄을 그을 뿐 그것은 완전히 다른 똑같은 이야기 하여 벚꽃이 부서지고 그 아래 멈추지 않는 강물이 흐르고 흘렀던 것이다
웹진 『시인광장』 2021년 5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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