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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분 시인 / 아무 일 아닌 것도 걱정이 되는
아무 일 아닌 것도 걱정이 되는 것이 사랑의 일이었다
맥 빠지듯 일상을 놓은 당신이 잠깐 흐려졌다 봄이 오는지 동백은 더 붉게 떨어지고
계절의 말미에 닿으면 이제는 혀끝이 무뎌진단다
자꾸 짜지는 손맛처럼 세상이 쉽게 절여진다는 당신의 말이 죽비처럼 들렸다
꽃구경 한번 실컷 못했다는 당신과 오늘은 꽃구경 간다
봄바람을 밀며 동백꽃 열차에 몸을 싣는 당신을 보며 유채꽃 피기 전에 입맛이 돌아왔으면 했다
덜컹, 꽃무덤에 갇혔다
지천으로 달아나는 봄꽃 속에서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데요라는 말을 흐렸다
꽃무덤에 파묻혀 웃고 있는 당신을 보며 아무 일 아닌 것도 걱정이 되는 격정의 봄이었다
시전문계간지 『시인시대 』2019년 봄호에서
김혁분 시인 / 늑대와 함께 춤을*
퇴직한 당신을 입양합니다 서랍 속 명함처럼 당신은 자주 혼잣말을 하고
열손가락을 걸고도 흐림이 있어 엇박자로 다가오는 당신에게 일상은 새빨갛게 지나가기 일쑤였습니다
우리에게 자주라는 말은 어느 날의 사랑에 대한 오독 자주 물었고 자주 울었고 혼자 잠들다 당신은 오늘 서서 커피를 타고 반복적으로 발을 구릅니다 집안에서 네 발로 기다가 두 발로 맴돌다 세 발로 설 때까지 당신은
하나 둘 셋
취사 버튼을 누르듯 저녁 항구를 떠나듯 춤을 추지만 발의 리듬엔 이슬이 맺혀있어 나는 돌아온 늑대와 함께 스텝 스텝 폭소가 쏟아질 때까지 춤을 춥니다
* 영화제목에서 가져오다
김혁분 시집, {목욕탕에는 국어사전이 없다}(근간)에서
김혁분 시인 / 판화
모든 굴곡은 칼날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
날에도 눈이 있어 형상의 그늘은 칼의 눈동자가 박힌 거다
각인된 문양에서 칼의 숨소리를 찾는다
견고해지는 판면의 고집으로 표정은 벗겨내도 같은 모습
벽에 기대 마주 서면 눈빛이 깊어지는
한발 물러서면 겹친 동선 위에 빛이 완성되는
견디는 것이 수없는 자기복제여도 한 줄 이력이 될 수 있다면
명암이 흐려진 길을 따라 돌다 판을 내려놓아도 될 것이다
생활의 귀퉁이처럼 파내고 깎아도 되돌아보면 다시 퍼즐 같은 생소한 길
음각을 파다 양각에서 발이 사라졌다
칼의 눈동자에 그물처럼 붙어있는 것이 나라는 걸 몰랐다
『시현실』(2019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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