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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규 시인 / 맨홀이란 제목
당신 살결에서 맨홀 냄새가 나요 맨홀 속에 죽은 나비들이 바글바글
길이 되지 못해 질주하는 강이 질주하지 않으면 썩어버리는 강이 당신의 등 뒤에 가득합니다
강물로 당신의 살결을 내가 씻어줄 것 같나요 그냥 등 돌릴 것 같나요 맨홀 속에 가득한 죽은 나비들 중에 살아 있는 나비가 있을까요 그게 질문인가요? 라는 표정으로 당신은 무심히 나를 멸시합니다 말없이 표정만의 멸시가 얼마나 후끈거리는지 당신은 모르시는 듯합니다
벽화 속에 당신을 가두는 상상을 합니다 생생한 벽화를 보려고 몰려올 사람들에게서 입장료를 받아도 될까요? 이것만은 당신에게 허락을 구하고 싶습니다 벽화에서도 맨홀 냄새가 나면 어쩌지요
맨홀 속에서 일생을 살았다는 사내를 압니다 그 사내는 죽은 나비를 먹고 연명했다고 합니다 그 사내가 나인지도 모릅니다 내 최종 목표는 당신을 강이 아닌 맨홀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용서하세요 당신 살결의 맨홀 냄새를 씻어주고 싶습니다 아닙니다 나는 그리 착한 사람이 못 됩니다 당신을 강 속으로 밀어버릴지도 모릅니다 내 속에 죽은 나비가 바글바글하니까요
기괴한 사내의 꿈 얘기일까요? 그 사내가 나인지는 정말 말하지 않겠습니다 제 발언은 여기까지입니다 이만 씻으러 강에 가겠습니다
김충규 시인 / 하필 물새여서
물새가 물을 얌전하게 먹을 때 나는 바위에 앉아 발목에 박힌 총알을 빼내고 있었어요 휴대용 칼끝으로 살점을 벌리고 조심스레 의사만큼이나 조심스레요 물새가 물을 다 먹을 때까지는 조용해야 하니까요 아니 물새는 내가 큰소리를 내어도 날아가지 않았어요 놀란 시늉도 하지 않았어요 총알 박힌 곳이 발목이 아니었다면 당장 뛰어가 요절을 냈을 텐데 아니에요 용서하세요 물새를 학대할 생각은 없었어요 내가 물새를 얼마나 사랑하는데요 몰래 딸을 낳으면 이름을 물새라고 하고 싶었는데요 믿어주세요 나는 배가 고팠지만 물을 안 먹었어요 우선 총알을 빼야 했어요 물새는 얌전하게 물을 먹고 있었어요 나를 방해하지 않았어요 아니 조금씩 눈치를 보긴 했어요 물새는 은근히 나를 즐기고 있는 듯했어요 병신, 그러니까 총이나 맞지! 하는 듯이요 여유가 표정에 넘쳤어요 물새만 아니었다면 가령 멧돼지였다면 육탄으로 덤벼들었을 텐데 하필 물새여서 아니에요 내 신세가 갑자기 처량해서 왜 하필 나는 물새가 물을 먹는 곳에서 총알을 빼야 했을까요 나를 짐승인 줄 알고 총을 쏜 포수는 또 누구에게 총을 겨누고 있을까요 다음은 설마 물새를 겨누지 않겠지요 눈에 물이 가득 고인 물새는 총알 한 방이면 골로 갈 텐데 물새는 그냥 물만 마시며 빵빵해지고 있어요
- 『시와세계』2012년 봄호
김충규 시인 / 아무도 없는 물가에서 노래를 불렀다
어두운 낯빛으로 바라보면 물의 빛도 어두워 보였다 물고기들이 연신 지느러미를 흔들어대는 것은 어둠에 물들기를 거부하는 몸짓이 아닐까 아무도 없는 물가에서 노래를 불렀다 노래에 취하지 않는 물고기들, 그들의 눈동자에 비친 내 몰골은 어떻게 보일까 무작정 소나기 떼가 왔다 온몸이 부드러운 볼펜심 같은 소나기가 물 위에 써대는 문장을 물고기들이 읽고 있었다 이해한다는 듯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댔다 그들의 교감을 나는 어떻게 기록할 수 있을 것인가 살면서 얻은 작은 고통들을 과장하는 동안 내 내부의 강은 점점 수위가 낮아져 바닥을 드러낼 지경에 이르렀다 한때 풍성하던 魚族은 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 그 후로 내 문장엔 물기가 사라졌다 물을 찾아온다고 물기가 절로 오르는 것은 아니겠지만 물이 잔뜩 오른 나무들이 그 물기를 싱싱한 잎으로 표현하며 물 위에 드리우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분명 나를 부끄럽게 했다 물을 찾아와 내 몸이 조금이나마 순해지면 내 문장에도 차츰 물기가 오르지 않을까 차츰 환해지지 않을까
내 몸의 군데군데 비늘 떨어져나간 자리 욱신거렸다 이 몸으로는 저 물 속에 들어가 헤엄칠 수 없다
김충규 시인 / 간 자의 그림자
가진 것 없으니 어둠이 근친이다 술이 핏줄이다 그렇게 살다간 큰형님은, 오십 중반도 못 넘기고 저승 갔다 간 자가 서럽나 간 자를 보내고 남은 자가 서럽나
모르겠다 ;
태양이 몰핀같이, 낮 동안 통증을 잊고 지내라 다그치고 나는 아우로서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어둠이 어둠과 섞여 더 질척해지는 동안 또 다른 누군가도 가진 것 없어 먼저 갈지도 모른다
궁금하지 않다 ;
다만, 누가 더 서럽나 간 자? 남은 자?
숨결에 불순물이 섞여서 수시로 기침이 터져 나오는 밤, 내 창밖에 서성거리는 저것이 간 자의 그림자라는 생각, 그림자 홀로 간 자가 죽기 전 걸어 다녔던 길들을 서성거리고 있다는 생각,
때론 눈알에 핏줄이 몰릴 때가 있는데 너무나도 선명하게 간 자와 함께 했던 어느 순간이 또렷하게 기억나는 때, 서럽다고도 안 서럽다고도 할 수 없는 그런, 간 자를 내가 더 빨리 가라고 등 떠민 게 아닌데 내 등이 후끈 차가워지는 순간이다 누가 내 등을 떠미는 듯,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땡끌땡글한 저승의 어둠 속으로,
붉은 눈알로 창밖을 바라보면 거기 간 자가 남기고 간 그림자, 아닌 듯 땅바닥에 드러눕는 것을 보기도 한다 내 그림자를 내 주고 그 그림자를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싶어지기도 하는데, 그러면 왠지 내가 이승을 아무 미련 없이 견뎌낼 수도 있을 것만 같은,
그러다 문득, 혹시 내가 간 자가 남기고 간 그림자가 아닌가, 멍해지기도 하는데
김충규 시인 / 석양
거대한 군불을 쬐려고 젖은 새들이 날아간다 아랫도리가 축축한 나무들은 이미 그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매운 연기 한 줌 피어오르지 않는 맑은 군불, 새들은 세상을 떠돌다 날개에 묻혀온 그을음을 탁탁 털어내고 날아간다 깨끗한 몸으로 쬐어야 하는 맑은 군불, 어떤 거대한 흰 혀가 몰래 천국의 밑바닥을 쓱 핥아와 그것을 연료로 지피는 듯한 맑은 군불, 숨 막힐 듯 조여 오는 어둠을 간신히 밀쳐내고 있는 맑은 군불, 그곳으로 가서 새들은 제 탁한 눈알을 소독하고 눈 밝아져 아득한 허공을 질주하면서도 세상 훤히 내려다보는 힘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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