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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춘 시인 / 들오리 기차
해질 무렵, KTX 기차가 산모롱이를 돌아 사라졌다 나는 방죽 길에 서서 오지 않는 내일을 기다렸다
아파트 방죽 길을 걷다 벼가 시퍼런 여름을 한참 바라보았다
갈 숲 사이로 음악 같은 들오리 한 쌍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잡목과 허공의 손을 잡고 헤엄치는 들오리 한 쌍의 눈을 오래 바라보았다 눈이 깊었다
70대 노부부 같은 황혼 들오리의 어깻죽지까지 내려와 있었다 10량짜리 삶이 지나가는 소리가 벼 포기마다 싱싱했다
나는 잘못 산 시행착오 앞에서 고아처럼 서성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먼 곳이 가까웠다
괴롭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던 구름 아래 시간들 들판의 먼 아지랑이 같은, 구름 아래 슬픈 음악 같은,
김성춘 시인 / 콜 니드라이 -막스 부루흐에게
저녁이다 당신의 슬픈 음악이 나는 좋다 길은 점점 어둑어둑해 오고 나는 어둑어둑해 오는 방죽 길 따라 혼자 걷는다 오지 않는 별을 기다리며
나는 황혼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은 당신의 음악처럼 슬프다 아니 슬프지 않다 당신은 당신의 음악을 들으며 한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가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며 한 사람이 죽었다 어제도 그랬고 옛날에도 그랬다
저녁이다 둥근 저녁이다 첼로가 흰 별의 맨발을 간곡하게 어루만지고 있다 하늘이 점점 더 어두워 오고, 나는 저무는 방죽 길에 서서 오지 않는 별을 기다린다 저녁이다
* 콜 니드라이 : ‘신의 날’을 의미. 유대교에서 속죄의 날 저녁에 교회에서 부르는 성가.
김성춘 시인 / 희망의 정석
지금 있다 내 가방 속에는
생수 한 병 노바스크 한 알과 새소리 두 알 읽다 만 가을 하늘 몇 페이지 봉인된 쇼스타코비치 피아노 에튀드
이것만으로도 나의 하루는 충분하다
두 손에 희망을 정중히 들고
神의 앞으로!
시집 『아무리 생각해도 먼 곳이 가까웠다』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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