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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성춘 시인 / 들오리 기차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11.

김성춘 시인 / 들오리 기차

 

 

해질 무렵, KTX 기차가 산모롱이를 돌아 사라졌다

나는 방죽 길에 서서 오지 않는 내일을 기다렸다

 

아파트 방죽 길을 걷다 벼가 시퍼런 여름을 한참 바라보았다

 

갈 숲 사이로

음악 같은 들오리 한 쌍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잡목과

허공의 손을 잡고 헤엄치는 들오리 한 쌍의 눈을 오래 바라보았다

눈이 깊었다

 

70대 노부부 같은 황혼

들오리의 어깻죽지까지 내려와 있었다

10량짜리 삶이 지나가는 소리가 벼 포기마다 싱싱했다

 

나는 잘못 산 시행착오 앞에서

고아처럼 서성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먼 곳이 가까웠다

 

괴롭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던 구름 아래 시간들

들판의 먼 아지랑이 같은,

구름 아래 슬픈 음악 같은,

 

 


 

 

김성춘 시인 / 콜 니드라이

-막스 부루흐에게

 

 

저녁이다

당신의 슬픈 음악이 나는 좋다

길은 점점 어둑어둑해 오고 나는 어둑어둑해 오는 방죽 길 따라

혼자 걷는다 오지 않는 별을 기다리며

 

나는 황혼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은

당신의 음악처럼 슬프다 아니 슬프지 않다

당신은 당신의 음악을 들으며 한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가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며 한 사람이 죽었다

어제도 그랬고 옛날에도 그랬다

 

저녁이다

둥근 저녁이다

첼로가

흰 별의 맨발을

간곡하게 어루만지고 있다

하늘이 점점 더 어두워 오고, 나는

저무는 방죽 길에 서서

오지 않는 별을 기다린다

저녁이다

 

* 콜 니드라이 : ‘신의 날’을 의미. 유대교에서 속죄의 날 저녁에 교회에서 부르는 성가.

 

 


 

 

김성춘 시인 / 희망의 정석

 

 

지금 있다 내 가방 속에는

 

생수 한 병

노바스크 한 알과 새소리 두 알

읽다 만

가을 하늘 몇 페이지

봉인된 쇼스타코비치 피아노 에튀드

 

이것만으로도

나의 하루는 충분하다

 

두 손에 희망을 정중히 들고

 

神의 앞으로!

 

시집 『아무리 생각해도 먼 곳이 가까웠다』 (2019년 12월)

 

 


 

 

김성춘 시인

1942년 부산에서 출생. 1974년 《심상》 신인상에 〈바하를 들으며〉 외 4편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방어진시편』外 다수 있음. 한국문협울산지부장과 경남문협부지회장 역임. 현재 한국시인협회 기획위원, 국제펜클럽울산펜회장. 신간각동인, 동해남부선동인, 시와언어동인, 울산수요시포럼동인. 울산대 시창작학과 주임교수. 경상남도문화상수상, 제1회울산문학상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