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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류미야 시인 / 모사(模寫)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12.

류미야 시인 / 모사(模寫)

 

 

일생 빛의 뒤를 쫒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홀로 밤의 우주를 유영하는 반딧불이, 건드린 허공마다 영롱히 돋아나는 그 위대한 오디세이를 따라나서 볼까요 스스로 빛나는 건 성좌를 모릅니다 별들은 제 이름을 호명하지 않아요 깨진 빛의 부스러기로 불씨를 지펴내는 두근대는 찬란을 소망이라 부를까요 남루의 골목마다 제 겉옷 벗어주는 빛이 되는 것들은 모두 맨발입니다 부르튼 뒤꿈치 로 첨탑 위 올라앉으면 뿔이 돋던 어둠도 귀가 순해지지요 모사꾼의 혀끝에서 갈라져 나간 길 위엔 몰려가고 몰려오는 얼룩진 말의 한 떼, 문 하나가 열리면 다른 문이 막히는 뻔한 스무고개를 속아 넘어가면서 죽도록 베낀 것들이 한데, 죄 그림자라니요

 

 


 

 

류미야 시인 / 한 밤의 몽상

 

 

빛 없는 어둠 속은 숨을 데가 없지요

한 치 앞 못 본단 건

쉽게 들킨다는 뜻

숨느라 바짝 붙어선 벽 관절이 투둑대요

 

냉담했던 냉장고의 흐느낌 들었나요

퉁퉁 부은 고독이 골목마다 다니는데

목덜미 문득 서늘할 땐

그가 곁에 온 거죠

 

오래전 관습들만 그림자로 살아남아

흔들의자에 앉아 시간을 짜 늘이면

그 줄 끝 붙들린 우린

인형처럼 춤춰요

 

의지라고 착각한 납덩이를 매단 채

새도록 달립니다, 심지어

꿈속에도

한밤 내 벽을 긁으며 고양이는 경고해요

 

빛 없는 어둠일수록 민낯이 잘 보여요

숨을 데는 많지만 숨 쉴 수 없는 낮을

용케들 걸어 왔네요

이리 순한

얼굴로

 

 


 

 

류미야 시인 / 다행한 일

 

 

이 생에서 나 하나 잘한 일이 있다면

고요한 견딤으로 기다릴 줄 알았단 것

이윽히 나비 날갯짓 바라볼 줄 알았던 것

 

바람 지난 자리에서 꽃잎 가만할 때까지

여윈 겨울나무에 여린 꽃눈 돋기까지,

멍 그늘 짙은 숲 속에선

가만 손등 감싼 것도

 

금빛 햇살 자란자란 물무늬 이는 강변

드러난 나무 밑동 위 낙엽을 덮어주며

갈대의 겨운 속울음 춤이 되는 걸 바라보네

 

별들의 불면 곁에서 선잠을 자다 깬 듯

이 생에서 나 무엇도 이룬 것 하나 없지만

고요히 바라보는 행복 알게 된 일 참, 다행이네

 

 


 

 

류미야 시인 / 신파(新派)

 

 

슬픔이 갖가지의 표정으로 온다는 걸

비 갠 뒤 이파리에 맺혔다 떨어지는

둥글게 무릎을 안은 뒷모습에서 본다

 

거느린 꿈 없이는 추락도 없다는 듯

오직 지는 것들만이 가지는

어떤 무게,

아침 새 앉았던 가지가

모르게 부러져 있다

 

누구도 이곳을 알고 온 이는 없고

삭정이인 줄 모른 채 걸음을 내디딘다

동정도 비굴도 없이

들이닥치는 저녁

 

다시 바람 쪽으로 나무는 돌아눕는다

형극의 월계관을 여윈 머리에 쓰고

검푸른 빛과 그늘로 출렁이며

춤추며

 

선천성 몸속 가시가 떠나지 못하도록

무릎을 더 둥글게 껴안으며,

나는 왠지

부러진 나뭇가지에 자주 발을 다쳤다

 

계간 《시와 사람》 2020년 겨울호

 

 


 

류미야 시인

1969년 경남 진주 출생. 서강대학교 대학원 국어교육 전공. 2015년 4월호 월간 《유심》 신인상 시조 등단. 시조집 『눈먼 말의 해변』 .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발행인 겸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