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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미야 시인 / 모사(模寫)
일생 빛의 뒤를 쫒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홀로 밤의 우주를 유영하는 반딧불이, 건드린 허공마다 영롱히 돋아나는 그 위대한 오디세이를 따라나서 볼까요 스스로 빛나는 건 성좌를 모릅니다 별들은 제 이름을 호명하지 않아요 깨진 빛의 부스러기로 불씨를 지펴내는 두근대는 찬란을 소망이라 부를까요 남루의 골목마다 제 겉옷 벗어주는 빛이 되는 것들은 모두 맨발입니다 부르튼 뒤꿈치 로 첨탑 위 올라앉으면 뿔이 돋던 어둠도 귀가 순해지지요 모사꾼의 혀끝에서 갈라져 나간 길 위엔 몰려가고 몰려오는 얼룩진 말의 한 떼, 문 하나가 열리면 다른 문이 막히는 뻔한 스무고개를 속아 넘어가면서 죽도록 베낀 것들이 한데, 죄 그림자라니요
류미야 시인 / 한 밤의 몽상
빛 없는 어둠 속은 숨을 데가 없지요 한 치 앞 못 본단 건 쉽게 들킨다는 뜻 숨느라 바짝 붙어선 벽 관절이 투둑대요
냉담했던 냉장고의 흐느낌 들었나요 퉁퉁 부은 고독이 골목마다 다니는데 목덜미 문득 서늘할 땐 그가 곁에 온 거죠
오래전 관습들만 그림자로 살아남아 흔들의자에 앉아 시간을 짜 늘이면 그 줄 끝 붙들린 우린 인형처럼 춤춰요
의지라고 착각한 납덩이를 매단 채 새도록 달립니다, 심지어 꿈속에도 한밤 내 벽을 긁으며 고양이는 경고해요
빛 없는 어둠일수록 민낯이 잘 보여요 숨을 데는 많지만 숨 쉴 수 없는 낮을 용케들 걸어 왔네요 이리 순한 얼굴로
류미야 시인 / 다행한 일
이 생에서 나 하나 잘한 일이 있다면 고요한 견딤으로 기다릴 줄 알았단 것 이윽히 나비 날갯짓 바라볼 줄 알았던 것
바람 지난 자리에서 꽃잎 가만할 때까지 여윈 겨울나무에 여린 꽃눈 돋기까지, 멍 그늘 짙은 숲 속에선 가만 손등 감싼 것도
금빛 햇살 자란자란 물무늬 이는 강변 드러난 나무 밑동 위 낙엽을 덮어주며 갈대의 겨운 속울음 춤이 되는 걸 바라보네
별들의 불면 곁에서 선잠을 자다 깬 듯 이 생에서 나 무엇도 이룬 것 하나 없지만 고요히 바라보는 행복 알게 된 일 참, 다행이네
류미야 시인 / 신파(新派)
슬픔이 갖가지의 표정으로 온다는 걸 비 갠 뒤 이파리에 맺혔다 떨어지는 둥글게 무릎을 안은 뒷모습에서 본다
거느린 꿈 없이는 추락도 없다는 듯 오직 지는 것들만이 가지는 어떤 무게, 아침 새 앉았던 가지가 모르게 부러져 있다
누구도 이곳을 알고 온 이는 없고 삭정이인 줄 모른 채 걸음을 내디딘다 동정도 비굴도 없이 들이닥치는 저녁
다시 바람 쪽으로 나무는 돌아눕는다 형극의 월계관을 여윈 머리에 쓰고 검푸른 빛과 그늘로 출렁이며 춤추며
선천성 몸속 가시가 떠나지 못하도록 무릎을 더 둥글게 껴안으며, 나는 왠지 부러진 나뭇가지에 자주 발을 다쳤다
계간 《시와 사람》 2020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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