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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감태준 시인 / 역에서 역으로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26.

감태준 시인 / 역에서 역으로

 

 

공원 벤치는 자고 나는 간다.

레일을 따라 아득한 세월 속으로

투덜대는 바퀴를 달래며

긴 짐칸을 끌고

간다.

 

잘 있거라, 거리여

심심한 가로등 불빛이여

남은 불빛 창 꺼트리며

막막히 서 있는 빌딩들이여,

 

축복하자, 구불구불한 레일에

구불구불 따라오는 저 바퀴자국을,

달아나는 택시에게 삿대질하는 저 취객을,

이 밤에 가야할 길 붙잡고 포옹하는

저 뜨거운 연인을,

 

나는 보면서 잊어버리고 간다.

잊으려고 해도 잊어지지 않는

까만 눈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잊으려고 해도 악착같이 옆에 와서 팔짱 끼는

내일을 끼고

 

가다가

어제 쉬어 갔던 커피 집

불 꺼진 간판 보고 싱겁게 웃는다,

여주인 시계 차고 달아난 아가씨를 생각하고.

 

웃지 않으면?

구불거리지 않으면?

 

나는 레일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짐칸에 실은 궤짝 단단히 묶고

욕망의 키만큼 긴 그림자를 끌고 간다,

집으로 아득한 세월 속으로.

 

 


 

 

감태준 시인 / 자판기 커피

 

 

커피 속에 종이컵 바닥이 어른거린다.

향긋하고 달착지근한 맛에

커피 주는 줄 몰랐구나.

자판기 커피가 일생의 거울인 줄 몰랐구나.

반품 안 되고 리필 안 되는

딱 한 컵의 생애,

마지막 한 모금 삼키고 나면

누구든지, 그냥 빈 종이컵 하나.

 

 


 

 

감태준 시인 / 아들에게

 

 

떠날 때가 왔다.

이 집에서 가장 먼 곳에

너의 집을 지어라.

 

새는 둥지를 떠날 때 빛나고

사람은 먼 길을 떠날 때 빛난다.

외투를 입어라.

바람이 차다.

 

길 곳곳이 얼음판이다.

겁 없이 미끄러지고

외투에 흙 남기지 마라.

외투란 먼지만 묻어도 누더기다.

 

앞이 어둡고 한기 들 땐

사람의 집을 찾아라.

마음이 불어가는 쪽에 있다.

 

마음이 불어가지 않으면

마음에 들어가 쉬어라.

 

길은 시련 속에 있다.

이제 도도히

갈 수 있는 데까지 멀리 가

너의 집을 지어라.

 

 


 

 

감태준 시인 / 홍방울새

 

 

금세 돌아올 것 같더니

가서는

가물가물 기억에만 비치는

홍방울새,

왜 꿈에만 오나.

 

고향 가서 아주 묻히겠다

그 사람 가던 날,

천변 나뭇가지에 앉아

혼자 울어쌓더니

그때 다 울지 못한 것을

마저 울고 싶어서 오나.

 

뜬금없이 꿈에 왔다 가면서

널따란 하늘이나 하나 더

펼쳐놓을 것이면

그 사람하고 같이 오지.

 

금세 돌아올 것 같더니

꿈에만 오는

홍방울새.

 

 —시집『역에서 역으로』(2014)에서

 

 


 

감태준(甘泰俊) 시인

1947년 경남 마산에서 출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 한양대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1972년 《월간문학》 신인상에 당선되어 등단. 저서로는 시집 『역에서 역으로』, 『몸 바뀐 사람들』, 『마음이 불어가는 쪽』, 『마음의 집 한 채』, 『사람의 집』, 『70년대 젊은 시인들』(공저) 등과 논저 『이용악시연구』, 편저 『한국현대시감상』, 『기도』 등이 있음. 월간 《현대문학》 편집장 및 주간,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예술대학장 역임. 한국시인협회상, 녹원문학상, 윤동주문학상, 한국잡지언론상 등 수상. 현재 문화예술인모임 <강변클럽>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