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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행숙 시인 / 이별의 능력 외 9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26.

김행숙 시인 / 이별의 능력

 

 

  나는 기체의 형상을 하는 것들.

  나는 2분간 담배 연기. 3분간 수증기. 당신의 폐로 흘러가는 산소.

  기쁜 마음으로 당신을 태울 거야.

  당신 머리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데, 알고 있었니?

  당신이 혐오하는 비계가 부드럽게 타고 있는데

  내장이 연통이 되는데

  피가 끓고

  세상의 모든 새들이 모든 안개를 거느리고 이민을 떠나는데

  나는 2시간 이상씩 노래를 부르고

  3시간 이상씩 빨래를 하고

  2시간 이상씩 낮잠을 자고

  3시간 이상씩 명상을 하고, 헛것들을 보지. 매우 아름다워.

  2시간 이상씩 당신을 사랑해.

  당신 머리에서 폭발한 것들을 사랑해.

  새들이 큰 소리로 우는 아이들을 물고 갔어. 하염없이 빨래를 하다가 알게 돼.

  내 외투가 기체가 되었어.

  호주머니에서 내가 꺼낸 건 구름. 당신의 지팡이.

  그렇군. 하염없이 노래를 부르다가

  하염없이 낮잠을 자다가 눈을 뜰 때가 있었어.

  눈과 귀가 깨끗해지는데

  이별의 능력이 최대치에 이르는데

  털이 빠지는데, 나는 2분간 담배 연기. 3분간 수증기. 2분간 냄새가 사라지는데

  나는 옷을 벗지. 저 멀리 흩어지는 옷에 대해

  이웃들에 대해

  손을 흔들지.

 

 


 

 

김행숙 시인 / 어떤 손님

 

 

  더러운 신발에서 끈을 풀고 솟구쳐 오르는 손님. 현관에 손님이 서 있다.

 

  아, 생각이 났다. 나는 2년 전에 당신을 초대한 적이 있었다. 그때 했던 6인분의 요리가 생각났다. 그때 입었던 옷은 생각나지 않았다. 언제나 기억나는 것과 기억나지 않는 것과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기억나지 않는 것과……

 

  아, 2년 후에 갑자기 기억나는 것이 있다. 대화중에 ‘법적으로 결혼 가능한 친족’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분명 숨은 뜻이 있었을 거라고, 2년 후에 궁금해하는 것은 얼마나 낯부끄러운 짓인가. 손님! 손님들!

 

  비밀스러운 애정과 비밀스러운 적의가 비밀스럽게 교환되는 자리에서 아는 것과 모르는 것과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과……

 

  2년 후에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과 “당신은 그대로예요”라는 말이 오버over하는 것과 감추는 것…… 말하고 싶은 것과 말하고 싶지 않은 것과 2년 후에 말할 수 있는 것과 2년 후에는 말할 수 없는 것과 영영 말할 수 없는 것……

 

  현관에 손님이 아직 서 있는 것이다. 서서 마주하고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둘 다 어색해지는 법이다. 그러므로 나는 어서 손님에게 앉을 자리를 권해야 해

 

 


 

 

김행숙 시인 / 떨어뜨린 것들

 

  여름 과일은 물주머니지

  겨울에 물은 얼지

  강물이 단단해지고 있어

  10센티쯤……

  내 얼굴에도 눈이 쌓였으면……

  나의 시체처럼

  그것은 내가 볼 수 없는 풍경이겠구나

 

  아이들은 흙장난을 하다가 이상한 것들을 발견하곤 하지

  어느 날은

  야구공이 굴러간 곳에서 이상한 것을 줍지

  손을 잃어버린 손가락 같은 것

  뭐지?

  찾았니? 저쪽에서 한 아이가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랐어

  과일을 깎다가 둥근 과일을 떨어뜨리자

  향기로운 벌레가 기어 나왔어

 

 


 

 

김행숙 시인 / 세월

 

 

발이 보이지 않게 달리기를 하지요. 점점 빠르게.

아아아 느리게. 마지막 숨결은 얼마나 멀리 있는 걸까요? 가까운 듯.

 

나는 달리기에요. 오른발 다음에 왼발, 모레 새벽에는 국경을 넘게 되지요.

총성이 까마귀 울음소리보다 자주 들리는 곳,

이곳에서는 점치는 여인들만이 늙어서 죽습니다. 탕, 탕, 탕,

 

총알을 피하듯, 나쁜 음식과 나쁜 꿈을 피했습니다.

 

지금은 말이야, 가족이 만들어지는 혼돈의 밤을 정리하기 위해

세번째 총성이 너의 귀를 흔드는 시각.

눈을 흐리게 하고, 탕! 거울 앞에 서보아라.

노파는 혼례복을 입은 손녀를 불러 마주하였습니다.

아름답구나. 처녀는 깜짝 놀랐습니다.

 

십년 후, 왼발 다음에 오른발, 나는 달리기에요.

오른발 다음에 왼발, 세월은 보이지 않아요.

 

나는 지나갔어요. 가장 슬픈 마음도 나를 붙잡지

못해요.

 

 


 

 

김행숙 시인 / 호르몬그래피

 

 

호르몬이여, 저를 아침처럼 환하게 밝혀주세요. 분노가 치밀어오릅니다. 태풍의 눈같이 표현하고 싶습니다. 저 자가 제게 사기를 쳤습니다. 저 자를 끝까지 쫓겠습니다.

 

당신에게 젖줄을 대고 흘러온 저는 소양강 낙동강입니다. 노 없는 뱃사공입니다. 어느 곳에 닿아도 당신이 남자로서 부르면 저는 남자로서

 

당신이 여자로서 부르면 저는 여자로서 몰입하겠습니다. 천국과 지옥의 세번째, 네번째, 일곱번째 사다리에서 거지가 될 때까지 카드를 만지겠습니다. 녹초가 되게 하세요. 호르몬이여, 당신의 부드러운 손길로 눈꺼풀을 내리시고

 

제 꿈을 휘저으세요. 당신의 영화관이 되겠습니다.

검은 스크린이 될 때까지 호르몬이여, 저 높은 파도로 표정과 풍경을 섞으세요. 전쟁같이 무의미에 도달하도록

 

신성한 호르몬의 샘에서 영원히 반짝이는 신호들

 

 


 

 

김행숙 시인 / 하룻밤

 

 

  하룻밤만 재워줘. 밤은 충분히 길고, 너무 큰 가방은 언제나 이야기보따리지.

머나먼 친척 아주머니는 19세기 나그네처럼 오늘 밤에도 문을 두드려.

 

  그렇지만 아주머니, 우리 집엔 빈방이 없어요. 빈방이 있다면, 왜 내가 여동생들과 한방을 쓰겠어요? 속옷을 나눠 입는 우리들은 서로를 반사해요. 거울 앞에선 것처럼 나는 독창적인 인물이 될 수 없어요.

 

  그렇다면 얘야, 마구간이라도 괜찮단다. 말은 이야기를 실어 나르는 동물이잖니.

우리들의 머나먼 할아버지가 말 위에서 굴러 떨어져 죽어갈 때, 그는 비밀을 품고 있었단다. 그가 하룻밤을 더 달렸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졌을 테지.

 

  그렇지만 알 수 없어요, 아주머니. 나그네가 두드리는 문이 모두 열리는 것은 아니잖아요. 우리 마을은 강간과 간통으로 세워졌어요. 전설적인 인물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알에서 까마귀처럼 깨어났지요. 아주머니가 내 어머니라고 해도 놀랍지 않지만, 우리집엔 마구간도 낡은 자가용도 없어요.

 

  하룻밤은 눈을 감았다 뜨는 사이에 지나가버린단다. 그렇지만 얘야, 영원히 눈을 감는다면 하룻밤은 계속해서 흐르지. 머나먼 친척 아주머니의 미소와 함께.

 

 


 

 

김행숙 시인 / 물의 친교

 

 

물고기는 움직이는 심장처럼

그러나 매우 조용히 살아가는 것들이야

물고기가 물고기를 뜯어먹을 때도 고요하지

 

오늘 아침 너는 피어나기 시작한다

너는 완전히 힘을 뺐다

내 안에서 자라는 식물들처럼 알 수 없이

새로운 삶처럼 끝없이

너의 머리카락이

흔들려

 

나는 너를 거칠게 대하고 싶어

죽은 체하는 걸까

산 체하는 걸까

 

나는 그림자와 친해

내 옆에 나무 한 그루가 있고

나는 나무 한 그루의 그림자와 친해

달빛은 검은 물체를 떨어뜨리지

햇빛은 잘게 부서지지

반짝이지

 

어젯밤 너의 눈빛은 하염없이 머물렀지

마치 눈먼 자 같은

그런 눈빛

그런 목소리로 너는 인생보다 긴 고백을 시작했어

 

 


 

 

김행숙 시인 / 이 책

 

 

낭독을 하겠습니다. 나는 이 책의 저자를 알지 못하지만, 킁킁 짐승의 냄새를 맡듯이 책의 숨소리, 문체를 느낄 때.

내가 이 책을 쓰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 책 뒤에 숨겨진 사랑을 내가 은신시켰다고 생각해요.

아아, 나는 사랑 없이 단 한 문장도 쓰지 못해요. 바람에 맡겨진 나뭇잎 같은 마음으로 낭독을 하겠습니다.

익사하려는 사람이 서서히 잠수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고개를 숙이며 낭독하겠습니다. 익사하려는 사람이 갑자기 허우적거리는 마음으로, 그렇게 머리를 쳐들며 낭독하겠습니다.

이 책을 부정하고, 강하게 부정하는 마음으로 낭독하겠습니다. 나는 한 글자 한 글자 녹일 듯이 뜨거운 목소리를 냅니다.

목소리에게 허공은 펄럭이는 종이입니까. 내 목소리도 하얗고 허공도 하얗습니까.

목소리는 허공을 만지고 허공은 목소리를 만집니다. 이 책이 낭독되고 있습니다. 내 목소리도 만질 수 없고 허공도 만질 수 없습니까. 지금도.

지금도 이 책은 이 책입니까.

 

 


 

 

김행숙 시인 / 탁자의 유령들

 

 

   여러분은 탁자를 완성하기 위해 착석하셨습니다. 앉아 계신 여러분, 앉아만 계신 여러분, 뒷면이 없는 여러분,

 

   한 분이 아닌, 두 분이 아닌 여러분, 여러분들이 들여다보고 있는 리포트의 뒷면에는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습니다. 아무도 죽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결정을 뒤집어도 아무도 살아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아닌, 두 분도 아닌 한 분이 손을 번쩍 드셨습니다. 누구세요? "저, 저, 저(는 왜 말을 더듬을까요?)기요, 펜이 바닥에 떨어졌어요. 별 뜻도 없이 딴 뜻도 없이 굴러가는 저것을 어떡해."

 

   주우세요! 애타게 찾으세요.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탁자 밑으로 들어가는 일은 간첩의 신분처럼 위험한 것입니다. 엿듣고 싶으세요. 탁자 밑에서 영원히 나오지 마세요. 입도 뻥긋하지 마세요. 침도 삼키지 마세요. 당신은 비밀이고 우리는 비밀이 없어요. 당신은 없어요.

 

   그리고 손톱으로 탁탁탁 탁자를 두드리시는 분, 몹시 신경에 거슬립니다. 마치 노크 소리 같지 않습니까. 탁자에 문이 있다고 믿으시는 겁니까. 어라, 손톱이 매우 깨끗한 분이시로군.

 

   우리에게는 동의해야 할 것이 산더미처럼 쌓였습니다. 부정해야 할 것이 똑같이 높은 산입니다. 밤을 새워도 끝나지 않고 밤을 새우지 않아도 끝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만장일치란 얼마나 지난하고 고통스럽고 아름다운 꿈인가요? 꿈결처럼 우리는 박수를 칩시다.

 

 


 

 

김행숙 시인 / 옆모습

 

 

  옆모습은 너의 절반일까

  똑같은 눈

  똑같은 코

  냉장고와 프라이팬에 나뉜 고깃덩어리처럼

  꽁꽁 어는 것

  불 위에서 녹고 타는 것

 

  옆모습은 어디서부터 어디로 어디까지 확장될까

  상상은 잘 펼쳐지지 않는다

  똑같은 모양으로 구부러진 팔을 상상하는 순간

  무서워!

  태어나지 않은 동생들처럼

  팔은 꿈속에서도 먼지 속에서도 자란다

 

  선반은 언제나 너무 높고

  네가 발꿈치를 들 때

  손이 손을 떠나 네가 문득 비었을 때

 

  똑같은 손이란 무엇일까

  상상할 수 없는 일이란 무엇일까

  네가 네게 칼자국을 몇 개 긋고

  싱싱한 화초처럼 불꽃을 심을 때

  오그라드는 살과

  명확해지는 뼈

  너는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을 향하여

 

  천천히 회전한다

  네게 박수를 보낼 수가 없어!

  오른손이 왼손을 모르고

  오른손이 오른손도 모르고

  너는 자꾸 벗어난다

 

 


 

 

김행숙 시인 / 타인의 의미

 

 

살갗이 따가워,

햇빛처럼

네 눈빛은 아주 먼 곳으로 출발한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뒤돌아볼 수 없는

햇빛처럼

쉴 수 없는 여행에서 어느 저녁

타인의 살갗에서

모래 한 줌을 쥐고 한없이 너의 손가락이 길어질 때

 

모래 한 줌이 흩어지는 동안

나는 살갗이 따가워,

 

서 있는 얼굴이

앉을 때

누울 때

구김살 속에서 타인의 살갗이 일어나는 순간에

 

 


 

김행숙 시인

1970년 서울에서 출생. 고려대 국어교육과 및 同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99년《현대문학》에〈뿔〉외 4편을 발표하며 등단. 시집으로『사춘기』(문학과지성사, 2003)와『이별의 능력』(문학과지성사, 2007), 『타인의 의미』(민음사, 2010)가 있음. 제8회 웹진 『시인광장』 올해의좋은시상(2014) 수상. 현재 강남대학 국문과 교수로 재직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