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웅 시인 / 곁에 없는 말
당신의 귓속에 물옥잠 꽃잎을 흘려 넣은 부장이 어느 잠결에 본 편지 같아 나는 네 개의 손가락에 불 붙여 흙벽에 걸어두고 물속에 번지는 글자들을 여러 번 이어 읽었다 까맣게 사그라진 손톱을 주머니에 넣고 아침이 오는 내항으로 걸어가 고개 들면 누군가 물속에서 등잔불을 흔들듯 노을 든 바다, 그 먼먼 끝자리에서 비로소 접히는 편지를 보았다 별자리들이 흐린 몸을 던지는 조류에서 입술이 태어난다고 믿었으니 가끔은 곁에 없는 말이 해변에 밀려오곤 했다 흰 종잇장이 형편없이 모아 쥔 말을 태울 때마다 무수히 태어나는 재의 나비는 모두 날개가 하나뿐이었다 슬픈 것들이 모든 여정 마치고 내 육체를 묘지로 쓰는 밤을 외면하지 않았으니 나는 나의 뒷면에도 써내려 가리라, 숨이 끊어진 채 수군거리는 재의 말들을 그렇게 곁에 없는 말을 다 살다간 너머에 마주 오는 사람이 있다한들 나는 모른다 성근 봄빛이 찬물처럼 목덜미에 떨어질 무렵 한 장 쭉 찢어져 백지로 날아가 버리는 한낮을
박지웅 시인 / 안녕을 안경이라 들을 때
너는 안녕이라는데 나는 안경이라 듣는다
너는 안경을 안녕으로 바루어 주고 나는 안녕을 다시 안경으로 고쳐 쓴다
안 보여? 너는 눈썹을 모은다 네가 내 흐린 안경알을 문지르는 동안 우리 사이에 사이가 불편한 자세로 앉아 있다
안경을 끼니 안녕의 세계가 선명해진다 네가 없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안경의 세계와 안녕의 세계는 얼마나 다른가 나는 처음 보는 세계로 들어간다 앞길이 보이지 않는다
안녕이 자꾸 콧등으로 미끄러져 내린다 나는 안녕을 끼고 안경을 닦고 있다
박지웅, 『빈 손가락에 나비가 앉았다』, 북인, 2019년, 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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