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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용화 시인 / 바깥에 갇히다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26.

정용화 시인 / 바깥에 갇히다

 

 

우리 집 현관 문에는 번호키가 달려있다 세 번

비밀번호를 잘못 누르면 가차 없이 문이 나를 거부한다

쓰레기를 버리러 나왔다가 지갑도 휴대폰도 없이

제대로 바깥에 갇히고 말았다

 

안과 밖이 전도되는 순간

열리지 않는 문은 그대로 벽이 된다

 

계단에 앉아 있는 30분 동안

겨울이 왔다

바람은 골목을 넓히려는 듯 세차게 불고

추위를 모르는 비둘기는

연신 모이를 쪼아댄다

 

내 것이면서 내가 어쩌지 못하는 것이

어디 문 뿐이겠는가

낡을대로 낡은 현수막이

바깥에 갇힌 나를 반성도 없이 흔든다

 

걸터앉은 계단이

제멋대로 흩어지는 길 위의 낙엽이

새들이 자유롭게 풀어 놓은 허공이

나를 구속하고 있는 바깥이라니!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나는 지금 바깥이다

 

 


 

 

정용화 시인 / 봄의 완성

 

 

향기를 반으로 접으면 나비가 된다

바람은 오래된 권력처럼 나태해지고

나무마다 온통 초록 연기를 뿜어낼 때 우리는 귀가 큰 구름을 쓰고

우기 속으로 저물어간 꽃 속에 당도한다

 

쉽게 부서지는 입술을 가진 당신

아직 꽃으로 피지 못한 것들이 한 줄의 비밀로 환원될 때

단단한 혀로 만져지는 침묵

나비는 정오 근처를 날고 봄은 수평선으로 확대된다

 

햇빛을 녹여 꽃으로 돌아가는 시간

나비 만으로는 봄을 다 말할 수 없기에 시드는 꽃을 바라보는 일은

늘 위태롭다

그것은 얼룩을 더듬어 일구어낸 몇 개의 발자국을 잃어버리는 일이다

 

나비의 문장은 설익은 고백이라서 향기라는 욕망을 갖고서야 봄을 견디는 법을 배웠다

계절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한 묶음의 봄으로 압축되면 투명을 향한 좌표 하나

지니게 될까 나비가 꽃 속에서 접고 있던 날개를 펼 때 비로소 절반의 봄이 완성된다

 

 


 

 

정용화 시인 / 물음표가 걷고 있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지팡이가 걷고 있다

꼬부라진 등에 오던 길을 구겨 넣고

노인을 끌고 지팡이가 길을 간다

 

마른가지에서 바람은 쉬이 흩어지고

얼굴에 낯선 꽃을 피울 때면

잎사귀들이 열리고 닫히면서

메마른 웃음소리 흙냄새로 사라지고

헐거워진 관절마다 신음소리 발자국으로 찍힐 때

저승에서 보내오는 다리하나

 

화두를 던지듯

마침표가 없는 물음표다

점 하나 어디에 잃어버리고 온 것일까

먼 길 오면서 빛과 어둠사이

아니면

인연과 인연사이 그 언덕 어디쯤

 

마침표를 찾아서

길을 지우고 또 지우면서

물음표에 한 생애가 매달려 걷고 있다

 

 


 

 

정용화 시인 / 술잔과 술잔 사이

 

 

내가 술을 마실 때에는 바다가 걸어나온다

눈을 부릅뜨고 어둠을 물고 있는 물고기들이 헤엄친다

누가 풀어놓은 매듭일까

봄과 여름 그 양 끝에 길게 매놓은 수평선 아래

부리가 짧은 새들이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한 잔과 두잔 사이

 

모음을 자음으로 바꾸기 위해 새들이 날아간다

여유로 남아있는 마침표 하나 태양은 하루 끝에서 아직 젊다

가장 뜨거운 순간에 투명하게 식어버린

술잔 속에는 영원한 속도로 정지해 버린 시간

내 눈동자에는 노을

그 붉은 울음을 달래기 위해 어둠이 오고 있다

 

두 잔과 세 잔 사이

 

파도는 잘 삭혀진 슬픔을 필사하느라 연신 펄럭이고 있다

갯벌은 수차례 스치고 부딪치며 사라져 간 이름들을 기억하고

이제는 다 타버려 움푹 패인 당신의 발자국을 바라보는 일은

빛으로 익숫해진 눈으로 누군가의 어둠을 이해하는 일이다

 

두 병과 세 병 사이

 

수평선의 길이는 침묵과 비례한다

뒷꿈치에 막 올이 나가기 시작하는 스타킹처럼 어둠은 빠르게 온다

비틀거리다 부딪친 낡은 모서리가 아프다기보다는 서러울 때

제시한 증명이 하나의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듯

깜박거리는 불빛이 현실과 멀어질 때 비로소 허공이 가득 찬다

가지고 있던 노래가 다 새어나간 조개처럼

 

 


 

정용화 시인

충북 충주에서 출생. 동국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1년 《시문학》으로등단. 2006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으로 『흔들리는 것은 바람보다 약하다』, 『바깥에 갇히다』, 『나선형의 저녁』이 있음. 2012년 수주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