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태준 시인 / 역에서 역으로
공원 벤치는 자고 나는 간다. 레일을 따라 아득한 세월 속으로 투덜대는 바퀴를 달래며 긴 짐칸을 끌고 간다.
잘 있거라, 거리여 심심한 가로등 불빛이여 남은 불빛 창 꺼트리며 막막히 서 있는 빌딩들이여,
축복하자, 구불구불한 레일에 구불구불 따라오는 저 바퀴자국을, 달아나는 택시에게 삿대질하는 저 취객을, 이 밤에 가야할 길 붙잡고 포옹하는 저 뜨거운 연인을,
나는 보면서 잊어버리고 간다. 잊으려고 해도 잊어지지 않는 까만 눈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잊으려고 해도 악착같이 옆에 와서 팔짱 끼는 내일을 끼고
가다가 어제 쉬어 갔던 커피 집 불 꺼진 간판 보고 싱겁게 웃는다, 여주인 시계 차고 달아난 아가씨를 생각하고.
웃지 않으면? 구불거리지 않으면?
나는 레일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짐칸에 실은 궤짝 단단히 묶고 욕망의 키만큼 긴 그림자를 끌고 간다, 집으로 아득한 세월 속으로.
감태준 시인 / 자판기 커피
커피 속에 종이컵 바닥이 어른거린다. 향긋하고 달착지근한 맛에 커피 주는 줄 몰랐구나. 자판기 커피가 일생의 거울인 줄 몰랐구나. 반품 안 되고 리필 안 되는 딱 한 컵의 생애, 마지막 한 모금 삼키고 나면 누구든지, 그냥 빈 종이컵 하나.
감태준 시인 / 아들에게
떠날 때가 왔다. 이 집에서 가장 먼 곳에 너의 집을 지어라.
새는 둥지를 떠날 때 빛나고 사람은 먼 길을 떠날 때 빛난다. 외투를 입어라. 바람이 차다.
길 곳곳이 얼음판이다. 겁 없이 미끄러지고 외투에 흙 남기지 마라. 외투란 먼지만 묻어도 누더기다.
앞이 어둡고 한기 들 땐 사람의 집을 찾아라. 마음이 불어가는 쪽에 있다.
마음이 불어가지 않으면 마음에 들어가 쉬어라.
길은 시련 속에 있다. 이제 도도히 갈 수 있는 데까지 멀리 가 너의 집을 지어라.
감태준 시인 / 홍방울새
금세 돌아올 것 같더니 가서는 가물가물 기억에만 비치는 홍방울새, 왜 꿈에만 오나.
고향 가서 아주 묻히겠다 그 사람 가던 날, 천변 나뭇가지에 앉아 혼자 울어쌓더니 그때 다 울지 못한 것을 마저 울고 싶어서 오나.
뜬금없이 꿈에 왔다 가면서 널따란 하늘이나 하나 더 펼쳐놓을 것이면 그 사람하고 같이 오지.
금세 돌아올 것 같더니 꿈에만 오는 홍방울새.
—시집『역에서 역으로』(201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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