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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장호 시인 / 아궁이 속으로 들어간 개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30.

박장호 시인 / 아궁이 속으로 들어간 개

 

내 시 속엔 시인이 없지만

자살한 시인이 행간을 걷는다고 나는 써보는 것이다.

인간은 상상을 하는 동물이어서

그가 죽기 전의 시인인지 죽은 후의 시인인지

매몰찬 독자는 내게 물을 것이다.

인간은 말을 꾸미는 동물이기도 해서

걷는 시인의 죽음도 죽은 시인의 걸음도 상상할 수 있다.

마음의 문법엔 시제 일치가 없고

내겐 독자가 없으므로 대답할 의무 없다.

 

어제는 마른하늘에 비가 온다.

내일은 젖은 하늘에 노을이 물든다.

오늘 낯선 사람은 어제 만난 사람,

오늘 반가운 사람은 내일 만날 사람.

 

파티션에 가로막힌 머리카락이 자란다.

붉게 물든 까만 머리카락이 자란다.

 

회상의 시인이자 부활의 시인이

그래, 내 시의 행간을 걷는 것이다.

그가 걷는 거리엔

두뇌를 스치는 단어의 속도로 시간이 흐르고

경제적 무장을 해제한 시인들이

말로 세운 안개의 건물 속으로 들어가

시대의 아픔과 개인적 정서의 소용과

미적 진보의 향방에 대해 논의할 것이다.

집에선 자식 없는 아내가

텅 빈 배 속에 휘몰아치는 비바람을 맞으며

유령 같은 남편을 기다릴 것이다.

안녕, 아버지를 배정받지 못한 정자들아.

안녕, 악천후 속의 난자들아.

너희들이 다시 보는 나의 과거라면

나는 어떤 시대가 받아주는 저주의 자식일까.

 

개가 된 논의가 오들오들 떨며

깨진 달걀 같은 폐가의 아궁이 속으로 들어간다.

째깍째깍 장작 타는 소리 불 꺼지는 장작에 달라붙고

반짝이지 않는 생각의 별이 아궁이 속으로 쏟아진다.

흩어지는 안개는 개의 머리를 쓰다듬는 시인의 손

살자, 오늘 만난 어제의 아내야.

살자, 내일 죽을 남편의 아내야.

 

개 한 마리 구워 먹고 쓸모없는 논의였다 하면

매몰찬 독자는 내게 물을 것이다.

개 같은 건 논의가 아니라

붉게 자라는 검은 머리털의 시인이 아니냐고.

 

비유의 경계는 편견뿐이고

마음의 마침표는 물음표뿐이어서

 

파티션에 가로막힌 개가 짖는다.

까만 털이 붉게 물든 개가 짖는다.

 

 


 

 

박장호 시인 / 태양은 뜨자마자 물든 노을이었다

 

 

당신의 귀에 닿지 않는 내 마음이

입술은 내 마음이 물든 노을이에요

아침노을은 비를 부른다죠

나는 무거운 하늘 아래 우뚝 섰어요

내 목각의 다리가 흙에 묻혀 있네요

내려다보니 나는 나무인 거예요

누가 내게 이토록 기다란 다리를 주었을까요

의문을 품을수록 길어지는 하체

침묵만이 발기하는 내게 지친 당신이

나의 의족에 불을 붙여요

다리를 휘감은 구름의 나이테가

가시관처럼 머리 위를 맴돌아요

나를 사르는 당신의 마음에 비가 내리는군요

소리 없이 원한 것이 죄예요

노을 속으로 고통의 새들이 날아오겠죠

차가운 아침을 떠나 저녁노을 속으로 날아드는

비 맞은 새들의 모습을 상상해보세요

내 몸속에 아름다운 자연이 깃들어요

새들은 나의 직립이 얼마나 조용한 비명인지

알고 있어요, 오직 고통의 새들뿐이에요

새들이 내 입속에 둥지를 틀어요

말뚝을 타고 오르는 저 불빛은

어둠뿐인 내 얼굴을 밝히겠지요

하늘엔 의성운(擬聲雲)의 붉은 혈관이 터져요

새들은 독이 든 열매로 익고

나는 당신의 눈동자 속에서 불의 옷을 입어요

입술은 내 마음이 불타는 화염이에요

비에 젖든 피에 젖든

곧 꺼져버릴 화염이에요

 

 


 

 

박장호 시인 / 문장은 독한 담배처럼 타들어가고

 

 

기타 위에 술잔 얹고

그 밤, 돌고 도는 시간의 강을 건넜지.

뒷걸음으로 내게 온 내 발자국이

나를 떠난 내 발자국 같아

여명의 하늘은 별들의 운행을 가로막고

울림통 속에선 멜로디가 휘발한 음악이

바다를 잃어버린 모래알처럼 부서졌지.

길이 막힌 유성들이 막무가내로 그린 궤적처럼

조율이 안 된 현은 폐 속까지 늘어지고

떨리는 현 끝의 두려움이 태양처럼 타올라

폐 속의 은하에도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었지.

벽지에 핀 꽃들을 향해 날아가는 연체의 나비

하얀 꽃잎이 휘몰아치는 한여름의 폭설

나는 나의 위성인 듯 내 둘레를 공전하고

나는 나만의 행성인 듯 나 스스로 자전하고

끝내 궤도를 이탈한 우주의 나방 되어

그 누구도 스쳐갈 수 없는 시간

문장은 독한 담배처럼 타들어가고

벽에 부딪힌 날들이 연기처럼 흩어졌지.

이봐, 술이 좀 약하군.

나의 위성이 나만의 행성에게 말했지.

나는 현을 감아 알코올 도수를 높이는 환각에 들었지.

나를 삼키려던 식도의 팽창이 기도의 수축으로 나를 내뱉어

우주는 아무리 할퀴어도 어두워지지 않고

역류하는 기침 속의 물고기들

울림통 속의 모래에 절어 온몸을 비틀었지.

현은 감기고 우주는 사라지고

물고기들이 비늘을 찢으며 처참하게 죽어갔지.

나의 폐와 울림통을 이어주던 단선(斷線)

끊어진 현이 자맥질하던 그 밤,

나를 떠난 내 발자국이 뒷걸음친 내 발자국 같아

나는 리듬만 남은 두려운 음악이었지.

 

시집『포유류의 사랑』(2014)에서

 

 


 

박장호 시인

1975년 서울에서 출생.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 2003년 『시와 세계』를 통해 등단. 대산창작기금과 박인환문학상 수상. 시집으로 『나는 맛있다』『포유류의 사랑』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