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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미네르바》신인상 당선작 권이화 시인 / 파우스트 밖으로 나오다
방안에서 생쥐 울고 있다 영혼을 팔 수밖에 없는 밤에는 외출 금지다, 아버지 나는 바깥 서재가 어디 있는지 찾는 중이었어요 화장실과 서재 사이에서 반짝 별만 마주쳤고요 아버지 별을 바라보던 섬찟한 눈빛과 훈육처방전 내밀던 고양이 앞에서 딸랑딸랑 꼬리 흔들며 호롱불 쬐며 몇 억 년 내려온 저 섬광 어쩌란 말예요, 그래도 처방전에 도장은 찍는 거란다
아버지는 옛날 약장수 한물 간 마술사일 뿐, 그러나 뿔 달린 계약서가 좋았다 유성이 비명을 지르며 직선으로 창을 긋고 가는 날은 찍찍 내 코가 벌름거린다고 마왕같이 뿔 난 머리로 내 코를 들이받던 당신의 계약서가 좋았다
불면처방전 붙은 불 켜진 파우스트 방 아버지 공들여 키운 메피스토펠레스 그의 방 엿본다 비커 수치 재는 밤이면 온몸에 별이 돋는다며 유리창 빽빽이 뿔의 수치 휘갈기는 사나이 침묵을 가둔 등에서 흰 이빨들 웃고 있다
영혼을 팔 수밖에 없는 밤에는 외출금지
권이화 시인 / 벽에 걸린 두 개의 그림
여자는 베란다에 서서 멀리 지중해를 바라보고
지중해는 벽에서 적막을 통과해 새를 보고 있다
새는 벽에 걸린 가슴이 붉은 해와 푸른 지중해를 본다 지중해의 속이 붉은지는 알 수 없다
바다를 만만해 하던 새의 날개는 태풍에 떠밀려 서서히 서쪽으로 이동하다 털이 빠져, 액자 속에 꿈꾸듯 엎드린 바다도 겁이 난다
지중해가 젖은 안구를 통과해 그녀를 보고 있다
그녀는 거울에 비친 무서움증을 앓고 있는 새를 훔쳐보다가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술술 뿌려 그곳에서 길어 올린 태양과 코발트블루, 신기루를 볶았다 등 뒤에 있던 새우 같은 아이들의 해초내음 그 한 때의 아름다움도 장식해 마지막 성찬을 차린다
지중해보다 푸른 저녁 일곱 시
새는 맞은편 벽에 새로 걸린 바다의 격랑을 재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
남자는 지팡이를 짚고 있지만, 근성은 겁이 없어 보인다
그녀는 넋을 잃고 지중해를 바라보던 여자의 방식으로 날개깃을 고르고 있는 새를 보고 있다
권이화 시인 / 월요일 오후
저녁 회랑에 기대앉아 편지를 쓴다 자꾸 자꾸 베니스에서의 죽음*이라 쓴다 편지는 하루 동안 발효되어 화요일에 부쳐진다
항상 당신께 도착하지 못하는,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 당신은 월요일 아침이다
오늘 아침 베니스 해변에서 노인이 죽었다 소년의 뒤를 따라다니던 눈빛을 거두고 들것에 실려 나가던 백마 한 구 좁은 허리를 다 빠져나간 모래시계를 나는 턱을 괴고 바라보고 있었다
시계의 밥을 주다 말고 월요일을 고정한다 당신은 월요일 오후 무엇을 하는가
소년이 먹던 푸른 토마토의 맛은 아렸지만 내 혀는 붉은 아다지에토 해변을 한 바퀴 돌다가 다시 식탁으로 돌아와 수평선 너머 흘러가버린 당신의 흰 눈과 노을을 본다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새 저만치 닿을 수 없는 새의 안쪽,
화요일 아침 회랑에 기대앉아 편지를 보내면 베니스의 해변을 보내면 이제 편지는 당신의 소년에게 닿을 수 있을까 지금은 토마토가 익어가는 계절이라고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
* 루치노 비스콘티 감독의 영화「베니스에서의 죽음」
-《미네르바》2014년 여름호
권이화 시인 / 순간에 날아왔던 새의 그림
새털 같은 깜짝 번개가 치는 사이 불새 한 마리 날아왔다 불새는 사과나무 위층에 앉으려는 나비떼를 스치고 날아갔다, 순간 새를 잡으러 쫓아갔다가
별이 된 카시오페아와 그 그늘에서 책을 읽고 있는 카페우스를 보는데 내 귀에 나직이 속삭이는 너의 목소리가 들렸다
번개는 내 머리에 피 한 방울 튀기지 않고 나비가 날갯짓할 때 먼 우주에 가 있습니다 거기서 죽어요, 불새가 몸을 털고
내가 시인이라면 불새를 따라 천년까지 쫓아가겠지요 나비를 스쳐간 날갯짓은 8분 19초*전이고 나는 항상 이 순간이니까
죽은 나비떼를 몰고 검은 숲으로 들어갔다, 순간 눈이 내렸다 하얀 새떼를 몰고 사과나무 위층에 새들이 날아오르고 날아오른 새들은 다시 내려와 부풀어 가는 사과꽃을 쓰다듬고 사라진다, 순간
내 머리에 피한방울 튀기지 않고, 너는 먼 우주로 날아가고 있었다
*태양빛이 지구에 도달하는 시간
권이화 시인 / 21그램의 진실
황무지를 실은 녹슨 기차가 붉은 하늘로 검은 새떼들이 날아오르는 도입부를 지나면서 영화 속 사내 얼굴이 비쳤다
기차는 거울 앞에서 잠시 멈추었다가 혹독한 꽃샘추위를 밀고 거울 속으로 들어갔다 사내는 먹물이 꽉 찬 옆구리를 짜내고, 붉은 꽃잎에 중독中毒된 제 입김을 끌어다 저울에 올린다 고작 21그램이다 그 옛날 바람에 중독되어 숲으로 떠난 어느 심장의 무게도 21그램이라고 했었다. 꿈이 어긋난 바람에, 번개와 번개가 마주쳐도 꽉 쥐었던 21그램의 무게들은 얼마나 털끝 같이 가벼웠나
우리가 가까워지도록 지구는 자전한다, 우리가 같은 꿈을 꿀 때까지…*
사내는 순간 누구도 삭제할 수 없던 이 중독된 가설을 놔버렸다 손이 가볍다
아틀라스 어깨에 뜨는 별의 무게도 사내가 가지고 떠난 21그램의 무게와 같았다 그러나 기차가 떠나버린 뒤 영화 속 사내의 이야기와는 달리 아무것도 진실이 되지 못했다 우리가 가까워지도록 지구는 자전한다지만 우리는 같은 꿈을 꿀 수가 없다 무게가 같아도 중독의 정도에 따라 위대하게도 차이가 났다.
단지 거대한 환경의 우주 안에서 부유할 뿐*
*영화 <21그램>
권이화 시인 / 수수께끼변주곡
수수께끼처럼 살다간, 카론성 성주의 옷자락에 눈이 내린다
잉카제국의 마추픽추는 지금도 눈이 내리면 별들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팬파이프를 불던 목신은 별들의 울음을 들으며 자란다는데
카론성 성주가 잠든 고성에는 눈이 내려도 별들의 울음소리조차 들리지 않고 목동의 휘파람을 들으며 자라던 양떼들은 깨지 않는다
바람이 눈을 털고 정원 옆으로 목장의 문을 열면
키 큰 향나무가 잠든 양들을 부르는 소리 돌이 된 새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소리
마추픽추에서는 아직도 별들이 눈 내리는 쪽으로 귀를 기울일 때 눈 속에서 양들이 오므린 입으로 풀을 뜯다가 목신의 팬파이프가 들리면 잠 밖으로 천천히 발을 내민다는데
누가 성주의 옷자락 위에 독한 잠의 꽃씨를 뿌렸을까 독을 품은 꽃들이 바람의 풀피리에 맞춰 성주의 묘지에 깊이 발을 내리고
잠 속까지 촘촘히 눈이 내리고
누가 잠 속으로 내려가 목동의 휘파람으로 수수께끼변주곡 (님로드*)을 연주하는지 고성의 바깥에는 스스로 우는 양들의 울음소리가 들리곤 한다
*엘가의 <수수께끼 변주곡> 중 9번
권이화 시인 / 우리가 잠든 사이
눈이 온다 세상이 백지 한 장 차이다
백지 같은 저곳에 백지 같은 마을이 생기면 내 방에 푸른 바코드를 새기고 간 안나 카레니나와 보바리 부인 모네 모딜리아니, 백지 속에서 만나던 그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을까
새벽이 탕 방아쇠를 당길 즈음 세상이 잠에서 깨어나 새가 되고 바람이 되고 나무가 되어 한 마을을 이루면 꽃과 나비 날아와 완전한 한 마을을 이루면 올빼미는 검은 알람에 목을 매지 않고 젊은 박제가 되어도 좋을까
오늘밤 백치 같이 눈이 내린다
눈은 소리 없이 내려 우리가 잠든 사이 우리의 이마를 덮고 흰 꽃을 달고 마을을 짓고 있다
포도주처럼 친숙했던 도시는 이제 안녕 언 발등에 키스하던 달콤한 시간도 안녕 집을 지우고 길을 지우고 우리는 지금 저 안개 속 마을로 가는 중이다
권이화 시인 / 구름의 질문들
구름 같은 공을 굴리며, 누구에게 물을까
캄캄하게 잠든 개를쓰다듬어도 개는 나를 모르고
고요의 거리로 나와 무릎을 꿇고 거울을 본다
한 소녀가 머리칼을 날리며 신나게 공을 굴린다
성당과 버스를 지나 숨은 꽃나무를 지나
달빛을 덮어쓴 거리의 신비와 우울을
길 끝에서 뚜벅뚜벅 걸어오는 긴 그림자 그 깰 수 없는 어둠을
달의 미소가 흘러내리는 이 거리에서 나는 얼마나 먼발치에 선 대륙인지 뚜벅뚜벅 걸어오는 어둠이 지팡이로 거리를 탕탕 내리치면 고양이는 온몸에 발톱이 툭툭 튀어나오지만 반은 신비 반은 우울로 갈라진 거리에서 승패라도 내듯 달로 가는 나는 구름일까 고양이일까
긴 그림자는 도마뱀인지 새 한 마리 오지 않는데, 거울 같은 달에게 물을까 공만 한 구름에게 물을까
아슬아슬 절벽을 버리고 두 손으로 힘껏 공을 밀어버리면 달은 어느새 쨍 깨져버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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