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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윤향기 시인 / 섬진강, 봄날은 간다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30.

윤향기 시인 / 섬진강, 봄날은 간다

 

 

 하늘에 발목 담그고 와선(臥禪)에 들어 스스로 신화가 된 하동땅 섬진강은 아직 원시림 그대로다 완만히 휘어지며 길게 풀어져 나아가도 끝과 끝이 맞물릴 때까지 결코 방황하지 않는 강 저물면서도 빛나는 섬진강은 생멸의 모든 것을 끌어안고 흔적도 없이 흐르고 흐르다가 걸핏하면 안개와 구름을 끼고 살지만 닫힌 듯 열려 있는 중세의 강물 속에서 간간이 오래 전에 들었던 물총새 소리가 하나씩 걸어 나와 비비총비비총 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젠 나도 너처럼 정지된 법열의 시간을 빠져 나와 빈 들판이나 너의 상처 같은 깊은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부질없는 생각의 부리는 쪼으지 않을란다 이미 모든 진리는 내 속에 밀경(密經)으로 조각되어 있고 세상의 모든 슬픔과 편견은 본래 면목이 없는 것이니

 

청매(靑梅)가지 사이로 달님이 조으실 때 강바람 타고 온 먼 산수유 냄새 같은 순토종 시인들과 마주 앉아서 재첩국을 안주 삼아 술을 마신다 시의 뼈에 감로수 같은 골리수(骨利水)*를 넘치게 채우자 막걸리는 노릇노릇 익어가고 봄밤은 하얗게 일어섰다

 

봄 일러 아직 꽃 피지 않았으면 지리산 칠불사 천비연이란 영지(影池)에 먼저 들릴 일이다 가락국 수로왕과 허황후가 출가한 일곱 왕자를 만나러 왔다가 생면하지 못하고 기다림에 지쳐 연못을 들여다보매 황금빛 가사를 걸친 일곱 아들이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이 보이는구나

날만 좋다면 그 영지에 앉아 혜진, 각초, 지감, 등연, 주순, 정영, 계영을 만나 외출한 달빛을 놓고 물소리 따라 산 아래 마을로 마실을 간다든지 먼저 탈속한 젊은 사내 따라 줄행랑을 친 것이라 우기든지 아님 성불한 금광왕불, 금왕당불, 금왕상불, 금왕행불, 금왕향불, 금왕성불, 금왕공불을 만나 하늘의 달을 쳐다보며 땅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지우는 선문답을 하시든지 아니면 청동기시대로 성큼 건너가 계림의 암탉소리라도 내보시든지 그러다가 법왕마을에서 꽃샘바람이라도 불어오거든 한번 땐 군불이 석달 간다는 벽안당의 아자방(亞字房)에 들러 볼 일이다 어느 한 말씀 찾아들지 않는 높은 누대에 앉아 명상에 들었다가 다리가 몹시도 저려오면 亞자 중심에 내려와 다리를 풀어 보시라 성자처럼 방은 누구도 불러들이지 않았지만 배웅나와 본 적도 없느니

방에는 방만 있었다

 

송광사, 사람주나무 건너편 매실나무에 매화 한 송이씩 피었다 아침 햇살에 빛나는 저 꽃 아름 꺾어 지눌(知訥)에게 드릴까

 

서둘러 모여든 백설양춘(白雪陽春)의 설운 가난에 흰 적삼마저 벗어 던진 맑고 고결한 여인이여 한 생의 절정이 얼마나 고단한 노동이겠는가마는 어떤 법열이 아픔을 통과하지 않고 오며 어떤 기원이 체념의 구름다리를 타지 않고 오랴 네잎 크로바를 위해 수 많은 세잎 크로바들이 죄 없이 짓밟혔던 것처럼......

 

선암사 입구에 선 채로 입적한 할머니 손등 같은 굴참나무 부처가 못됐으면 어떠랴 즐거이 맑은 달빛을 온 몸으로 견뎠을 것을 이미 달빛만으로도 적멸인 것을 모두 숲으로 가는 나무다 숲은 정지를 통해 성찰에 머무는 시간이다 시 한 수로 남자의 영혼을 휘어잡는 해어화(解語花) 매창이나 아름다운 무위(無爲)로 깨달음에 동석한 매화는 향기를 팔지 않는 선암사 뒤뜰에서 천년 간 여래께 바친 향촉도 미진해 이 겨울 마리카**여인의 머리카락을 딛고 햇살에 소신공양 중이다

 

산청군 단성면 남사마을 하참판댁 古家로 겹 홍매화를 보러 갔었네 그댁 공덕비보다 신령하여 사람과 소통한다는, 종다리 청아한 보리밭 두렁을 넘어 선사시대로 성큼성큼 건너가듯 나는 내려앉은 돌담을 월장하였네 안으로 들어서자 훅! 온몸을 덮치는 꽃향기, 그 내부에 숨어 있던 고요가 벌분분 벌분분 보쌈하기를 칠백년이나 기다렸네 눈물처럼 후두둑 질까 잔 들어 권할 적마다 달보다 먼저 잔을 채우는 淸香의 카스트라토, 그 소리에 취해 나는 그만 매화 아래 누워 잠들고 말았네 나 없고 그대 없는 이상한 몽유매원에서 갓 피워 올린 그대 몸 만질 때 마다 비늘처럼 장자의 나비가 묻어나오는 저 붉은 문장들 아! 살꽃이 떨렸네

 

한 삼일 매원을 서성이다보니 가슴 속은 어느덧 한 폭의 몽유매원도처럼 그윽해졌다 저무는 꽃과 꽃 사이 매실을 준비하는 터엉 빈 사무침처럼......

섬진강을 지나가는 봄의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골리수:고로쇠 물

**마리카:여래께 아끼던 머리칼을 잘라 공양한 인도 여인

 

 


 

윤향기 시인 객원 편집위원

경기대 대우교수. 1991년『문학예술』등단. 시집『피어라, 플라멘코!』외 5권. 에세이『아모르파티』외 10권. 평론집『나는 타인이다』외 총 20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