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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경호 시인 / 청어의 방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30.

2019 한국문학방송 신춘문예 당선

이경호 시인 / 청어의 방

 

 

꽃핀 꽂은 별들이 첨벙첨벙

청어의 입으로 들어가는 날

 

삶을 꾸덕꾸덕 말리는 죽도시장 좌판

잔가시를 뱉는 짧은 겨울햇살

노파는 수심을 알 수 없는

주름 바다를 키운다

 

사주단지 앞세워 시집오던 첫날밤부터

비린내로 쩐 소매

노파의 주름이랑은 청어 떼가 헤엄치는 길

 

청어는 노파의 살과 뼈를 다 갉아먹고

고단한 물빛 지느러미를 흔들며

고향 심해바다로

물살을 가르며 헤엄치는 봄꿈을 꾼다

 

청어뱃속에 바람소리 여물어 갈 때

파랑노래가 된다

노파는 작고 푸른 부레를 베고 눕는다

 

첫 별이 뜨면 수평선 너머로

청어의 방 하나 생기고

그때부터 하현달은 자라기 시작한다

노파는 어디로 갔나

낮하늘에 낙관 하나 희미하게 찍어두고

 

 


 

 

이경호 시인 / 환절기 관절염

 

 

무릎이 멍든 밤이면, 멍을 뚫고 굴참나무가 자란다

 

굴참나무엔 도토리거위벌레가 기생하고

개똥지빠귀 철새가 몰고 온 창백한 구름,

구름을 접는 달빛 계단에

어린 개암나무 그늘이 주저앉아 운다

 

땅 밑을 굴러간 도토리들이 나무뿌리를 더듬다가

햇빛을 외면한 어둠에서 만난

휘파람소리

 

늙은 뿌리 혈관은 내일을 예감하고

꽃과 잎은 대궁에 도착하기도 전에 관절염을 앓는다

물관과 체관을 흔들어대는 푸른계절

나뭇잎은 더운 숨으로 허공을 나부끼게 한다

 

굴참나무 옹이에 들어앉은 상처

환절기에 파르르 떨며 살아남은 잎맥들의 시간

 

건조한 발목에 장수풍뎅이가 터를 잡고

숲은 바람의 숨결을 쌓아 올린다

어제를 쌓고 오늘을 여며, 내일을 만들고 있다

 

 


 

 

이경호 시인 / 귀신 고래의 혈통

 

 

나는 사월에 죽은 귀신고래의 혈통

나의 내부는 함부로 어두워지지 않는다

봄빛 떠도는 적막에서 태어나

수평선 넘나드는 비명소리를 가졌다

 

눈물 젖은 눈으로 울다가 귀신을 만나면

죽은 고래의 영혼이 옮겨온다는데

등줄기에 업보를 짊어지고

물빛 다리를 파도더미에 놓는다는데

 

나의 전생은 잔별로 풀어헤친 윤슬

내 가문의 뿌리를 찾아 헤매는   

파도더미는 흰 핏줄을 다발로 허공에 터트린다

최초의 피가 뿌리를 내릴 뭍이 없다

 

헛것을 보는 눈이 침침하다

 

구천을 떠돌던 공기방울들이

노을과 피를 나눠가질 때

따개비로 주저앉는 저녁이 돈다

습습한 플랑크톤 잔뼈를 뱉는 정어리 떼가 밀려온다

 

누가 귀신고래의 혈통을 찾아 헤매는가

나는 귀신고래가 숨어서 키운 상처다

 

 


 

 

이경호 시인 / 새를 기다리는 밤

 

 

빛바랜 이파리 사이로

새가 숨소리를 묻고 그림자로 흔들리고 있다

 

구름이 머물다 떠난 자리

벌거벗은 바람이 날선 하루를 벗겨낸다

 

발가락에 피를 말리며 떠다니는 무수한 새들의 수다

푸른 한나절 바람을 품었다 날리는 중이다

 

애기무덤가 칡꽃 술에

뜨거운 입맞춤 하는 부리들

 

칡꽃에 찍힌 입술자국은

계절을 잃어버렸다

 

환한 향기로 발아하는 그믐밤

붉은 꽃물 떨구며 새를 기다리는 밤이 야위어가고 있다

 

 


 

 

이경호 시인 / 그렇지

 

 

바다는 수심으로 파도를 키운다

 

가시를 발라먹은 손가락

받아들일 수 없는 어둠

이러지도 저러지도 꼼짝할 수 없는 궁지

파도가 온몸에 푸른 흠집을 내도

밥에 섞인 모래 씹는 기분으로

바람을 걸러내는 모래

 

깊고 캄캄한 바다 푸른 밑에는

긴 창과 단단한 칼로 무장한

사람 사람들

성난 짐승으로 사납게 무리 져 오는 비린내

 

낚싯배는 미끼속에 바늘을 내리고

해초 사이를 비집고 다닌다

귀속을 간질이는 물결

눈동자를 파고드는 날개짓

부서지는 바람소리

끌어안고 뛰어내리는 절벽

깨지면서 길을 연다

 

어둠을 찌르고

부서지는 방향으로

넓고 하얀 바다가 고요의 심지를 세운다

 

 


 

이경호 시인

충북 괴산 출생. 중앙대학교 공과대학 졸업.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문학과. 성동구민대학 시창작반, 성동구립도서관 글쓰기 동아리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