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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민호 시인 / 행복
우리가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을 때 옷 없는 짐승들처럼 골목 깊은 곳에 단둘이 살 때 우리는 가난했지만 슬픔을 몰랐다 가을이 오면 양철 지붕 위로 감나무 주홍 낙엽이 쌓이고 겨울이 와서 비가 내리면 나 당신 위해 파뿌리를 삶았다 그때 당신은 내 세상에 하나뿐인 이슬 진주 하지만 행복은 석양처럼 짧았다 내가 흐느적거리는 도시 불빛에 익숙해지자 당신은 폐에 독한 병이 들어 내 가슴 속에 누웠다 지금 나는 거울에 비친 내 얼굴에 침을 뱉는다 시간이 물살처럼 흐르는 사이 당신을 잃어버린 내게 남은 건 상한 간과 후회뿐 그때 우린 얼마나 젊고 아름다웠나 우리가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을 때 백열등 하나가 우리 캄캄한 밤을 지켜주던
『나는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2010. 실천문학사)
방민호 시인 / 벚꽃 지다
날이 흐리다 어제보다 흐린 오늘 꽃이 떠나고 있다 네 슬픈 눈시울처럼 붉어진 흰 꽃잎 눈보라처럼 흩날리고 있다 나 여기 레테의 강 건너 네 곁으로 왔단다 함께 있는 때만이라도 즐겁기로 했었지 약속을 어긴 건 당신이에요 너는 말하는데 꽃나무는 말이 없다 책을 읽어야겠지 상처 다스리는 법이 페이지마다 씌어 있지 아무도 찾지 않는 방에 들어가 비밀스레 나의 모더니즘을 읽는다 꽃잎처럼 흩어진 시간 끝에 선다 벼랑 끝에 바람이 분다 생은 스러지기 전에 크게 한 번 빛나는 법 꽃잎 떠난 자리에 황토비 내리겠지 너 떠난 자리에 칠흑이 서겠지
방민호, 『나는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실천문학사, 2010, 14쪽
방민호 시인 / 역설
회색은 세상에서 가장 투명한 빛 흰 빛보다 검은 빛보다 순수한 빛 세상을 바닥까지 들여다본 이들만 늘 자기 곁에 숨겨두고 아끼는 빛
가장 견고한 것은 흘러다니는 것 저 구름과 바람, 일렁이는 산 안개 바닥없는 세상 바닥 깊은 곳에 형체도 빛깔도 없이 머물러 있는 것
가장 슬픈 것이 한없이 기쁘다 우리가 이렇게 외롭게 사는 것 진리 없는 이 회색빛 세상에서 목숨이 다하도록 견고함을 찾다
- 시집 <숨은 벽> 방민호시인, 서정시학,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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