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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함민복 시인 / 봄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31.

함민복 시인 / 봄

 

 

국토통일원에 목련꽃이 피었다

족구하는 직원 몇

공 따라 네트 넘는 공 그림자

담 넘지 않고 넘은 담 그림자

 

흔들리지 않는

흔들리는 꽃 그림자

 

봄의 혓바닥

 

목련꽃 한 잎 떨어진다

그림자 한 잎 진다

 

만나

 

꽃이 썩으면

썩어 빛이 되는 꽃 그림자

 

 


 

 

함민복 시인 / 최제우*

 

 

하늘에서 나무 대문 열리는 소리가 난다

어디로 가는가 기러기 떼

八자 대형으로,

人자 대형으로

동학군의 혼령인 듯,

하늘과 땅 사이에 사람 인자 쓰며

人乃天

하늘을 自習하며 날아가는

기러기

저리 살아 우는 글자가 어디 또 있으랴

목을 턱 내밀고 날아가는 모습이 서늘하다

 

*최제우: 동학 1대 교주. 칼로 목을 내리쳤으나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고 함.

 

 


 

 

함민복 시인 / KTX 역방향을 타고 가며

 

 

1.

목적지를 등지고 앉아보오

풍경과 멀어질 뿐 이별은 없소

죽음 같소

등지고 살아보나

결국 등지고 달려가는

아하, 내가 아닌

풍경이 이제 나를 밀어내오

그동안 순방향에 퍽 섭섭했나보오

등지고 가면 등 뒤 사람이 내 앞

내 앞 사람이 내 뒤

역방향이 운명인 백미러여

너의 추억은 너의 앞에 있구나

 

2.

건강을 위해 뒤로 걷는 것처럼

이것도 무슨 운동이 좀 될 성도 싶소

여보, 당신들이 내 뒤

아니 내 앞에 있었던 풍경들이요

내 그대들 맞아주지 않았어도

나를 향해 달려왔구랴

멈춰 서서 달려오는구랴

기실 우리 삶도 등의 힘으로

앞으로 가는 것 아니요

연필처럼 뒷걸음치며

살아내는

아하. 뒤 꽁지에 달린

죽음이라는 지우개는 참 유효하오

열차여 목적지는 아직 멀었는가

 

3.

순방향에 비해 가격이 저렴한 까닭은 무엇이요

풍경을 가불할 수 없어서 그런 것이요

뒤로 달려가던 풍경들이

냅다 앞으로 물러나는구랴

출발지를 앞에다 두고 멀어짐도 묘한 매력이 있소

어째든 승객들 반반이 마주 보고 앉은 장면에

데칼코마니 같은 박수를 보내보오

아하, 우리를 위해

달도 태양도

밝은 얼굴 우리 쪽 향하려

순방향과 역방향을 반복하며

긴긴 주행을 하고 있었구랴

 

 


 

 

함민복 시인 / 춤추는 만득이

 

 

우리들 애칭은 춤추는 고무풍선이야

우리들은 바람을 일으키려

개업하는 곳에서 자주 판을 벌이지

살도 뼈도 근육도 다 바람이고

바람이 없으면 일어서지도 못하는

우리들은 순수한 바람의 자식들이야

엉덩이 허리 가슴의 곡선도 지웠어

오직 바람이 통하기 편한 몸매지

내부의 바람이 우리들 신명이야

내부에서 외부로 향하는 바람으로

팔을 흔들고 목을 돌리고 허리를 꺾지

외부의 바람과 어우러지는

나무들의 춤과는 격이 다르지

외부의 바람이 심한 날은 오히려

춤사위가 흐트러질까 싶어 아예 쉬지

스텝은 없어 스텝은 파멸이야

음악도 상대도 필요 없어

가급적 곡선을 버리고 직선을 택하며

혼자 즐기면 되는 거지

바람 춤을 출 때만 우리는 우리가 될 수 있어

동작이 단순하다고 흉보지 마

앞뒤 양면의 얼굴로 보고 있으니까

이건 수직으로만 솟아오르는 춤이야

잘 봐

우리들 춤이 무엇을 닮았는지

 

 


 

 

함민복 시인 / 햇귀

 

 

이불 뗏목 타고 떠나는 꿈의 세계

파란만장 파란만장

인연 있는 사람 낮선 사람 죽은 사람

관계의 사슬 물처럼 흐르다가

아침 햇귀에 눈뜨면

언제나 혼자일세

어두운 죽음이

나를 그렇게 데리러 올 걸세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창비, 1999)

 

 


 

함민복 시인

1962년 충북 중원군 노은면 출생.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북 월성 원자력 발전소에서 4년간 근무. 서울예전 문예창작과에 입학. 2학년 때인 1988년 <세계의 문학>에 <성선설> 등을 발표하며 등단. 1990년 첫 시집 <우울氏의 一日>을 펴냄. 1993년 <자본주의의 약속> 발표. 2011 제비꽃 서민시인상 수상 외 오늘의 예술가상 수상. 제 24회 김수영 문학상. 제7회 박용래문학상. 제2회 애지 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