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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권이화 시인 / 네 개의 마지막 노래는 기차를 타고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31.

권이화 시인 / 네 개의 마지막 노래는 기차를 타고

 

 

어제의 젖은 문장을 지나가요

 

산타마을에서 당나귀를 타고 네 개의 마지막 노래*를 듣습니다

잠들기 전 십자매를 안고 슈바빙으로 가야 할 텐데

 

슈바빙 슈바빙 부르는 사이 눈이 내리고

오늘의 십자매는 귀를 곤두세워요

 

어제는 산타마을의 동쪽에서 놀았습니다

눈썹을 세우고 미간을 좁혔어도

산타들의 행렬을 따라 마을을 떠났다 돌아오곤 했지요

 

빠르게 노래를 관통해버린 태양의 흑점

사랑이 기차를 타고 몰락으로 가는 길입니다

 

눈이 그치면 당나귀를 타고 코가 푹 빠질 때까지

십자매와 나란히 북쪽으로 갈수도 있습니다

 

새벽녘 푸른 안개 속에 솟아오르는 일몰까지

끝없이 이어진 젖은 문장을 지나 노래는 이어지고

끝내 닿을 수 없어

 

슈바빙 슈바빙 부르다 홀로 돌아온

나는 십자매를 놓쳐버리고

당나귀는 멀리서 울음을 터트릴 텐데

 

비가 내리는 내일의 젖은 문장을 지나가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네 개의 마지막 노래」

 

 


 

 

권이화 시인 / 죽은 시인과 나

 

 

당신은 그를 모르고 그는 당신을 모르고

 

이 문장은 죽은 시인이 정착하기 좋은 곳인가 귀를 세우다가

시로 살아가는 방식에 귀를 내린다

당신은 시인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등 뒤에 뜬 별을 보는 것이라는데

 

코타키나발루산 새벽녘 암벽을 오를 때

하늘에는 몇 십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던 별이 있었지만

아스라한 낭떠러지를 보고 착오를 바로잡듯이

되돌아오는 길

벼랑 밑에 핀 낯선 별꽃

왼쪽 정강이가 얼어버린 당신 암벽 꼬리에

절망의 낙관을 찍었고….

 

허공에 아슬아슬하게 떠 있는 죽은 시인의 얼굴을 찾아

별의 말로 점치다 오른쪽 손가락을 부러뜨린다

 

그는 당신을 모르고

이카로스 추락이 있는 풍경*을 모르고, 당신은

 

먼지를 털 수 없는 하늘 어디쯤에

시인들이 살아가는 아슬아슬한 방식에 찍을 낙관을 생각한다

 

* 대 피테르 브뢰헬 그림

 

 


 

 

권이화 시인 / 분홍의 세계

 

 

두통이 이는 하루를 새 울음으로 행군다 나무와 나무를 옮겨가면서 부지런히 울음을 우는 새 봄이 가는 새 그리고 겨울이 오는 새

 

새 발자국을 따라 겨울 숲에 이른다 웅크리고 앉아 새들의 세계로 들어간다

 

차가운 시대를 노래하는 새 새들의 종말을 예감하는 새 울면서 날아가는 새 태양이 뜨는 머리 위에서 활짝 깃을 펼치고 목청껏 우는 새

 

숲으로 찾아온 겨울은 길다 짙은 나무 그늘이 겹쳐진다 눈이 내리면 가라앉은 나뭇잎 밑에서 겨울을 나는 벌레들이 작은 눈을 뜨고 새 울음을 울었다

 

종일 왼쪽 머리를 새 한 마리 쪼고 있다 터널을 지나간다 가방은 무겁고 겨울바람이 태엽을 감는다 나는 비상하려고 우는 새를 키운 적이 있었을까

 

다시 봄을 상상하면서 노래하는 새의 지저귐들 겨울 숲을 깨운다 새 발자국을 따라 새의 그늘을 열면 새소리 끝으로 분홍이 오고 있다

 

 


 

 

권이화 시인 / 물구나무의 문제

-청계천을 건너는 오후

 

 

땅 속으로만 자라는 바람소리가 있어

귀 언저리를 지나가는 죽은 뿌리 사이로 물이 흐른다

 

때로는 물구나무로 꾸는 꿈에 대해 귀를 닫고,

우물을 뒤집어쓰고 물을 줄줄 맞으며 물구나무를 선다

 

오래된 검은 잎처럼 더 이상 자랄 수 없는 낮은 곳에서

온몸에 악몽을 가둔 도시에서

 

부처님도 물구나무로 외로운 돌멩이 될 때

 

거꾸로 흐르는 실개천은 목숨을 건 우주의 혈관처럼

피가 거꾸로 솟구쳐 뒤집어질 것 같은 세계

피도 눈물도 없는 노을의 아름다움을 공양 받고 있다

 

거꾸로 선 돌멩이 너머로

시계를 거꾸로 돌려놓고 상실을 향해 가는 젖은 나무들,

당초무늬 따라 벽 속으로 끌려간다

 

손가락 하나 까딱거릴 힘으로도 뒤집어져

구름무늬 타고 날아간다

 

끊임없이 살아 있는 심장을 달고

 

 


 

 

권이화 시인 / 길

 

 

우리 서로 보기만 하는 백지 한가운데

길 하나 만들지

당신이 반쪽을 오고 내가 반쪽을 가는,

젤소미나가 트럼펫을 불며 지나갔던 그

반푼이의 반듯한 길, 같은

 

그러면 나와 당신 걸어 간 곳, 곳에, 곳곳에,

발자국 초롱초롱 제비꽃 피어 새파랗게 피어

눈이 되고 춤이 되고 노래가 되다가

 

아무도 찾을 수 없는 황금나선 속에서

우리가 알 수 없는 모래에 덮여도

당신은 손을 뻗어 먼지를 쓸고 나는

트럼펫 불며 맨발로 걸어가는 길

 

그리하여 아무도 찾을 길 없는

 

 


 

 

권이화 시인 / 명랑주의보

 

 

손바닥이 기울어진 채 기차를 타고 팔랑팔랑 바다로 갈래

바다의 한가운데서 보이지 않는 것들에 닿으려는 표정으로

고백하는 노을을 흩어놓을 때, 손은 꿈을 멈추지 않는다

멸치 떼 같은 명랑의 군무가 물보라를 일으키네

어떤 꿈이 바다 깊숙한 곳으로 사라지는 순간을 보며

창밖으로 팔랑팔랑 넘어가는 명랑한 이름들

오늘의 바다는 풍랑주의보, 검은 바다의 안쪽이 위태롭네

여기서부터 섬까지 얼마나 걸릴까

그러니까 팔랑팔랑 우리의 명랑주의보는 쾌속정의 일

명랑에서 명랑으로 넓이와 깊이를 만들며 쾌속정은 달리지

다가가면 갈수록 점점 멀어지는, 여기는 꿈 명랑이야

바다를 밀면 죽은 물고기 떼가 가득 찬 바다의 내부

파도를 타고 수많은 계단이 있는 푸른 당신에게 도착한다

내 손은 여전히 섬에 도착하는 일, 속도를 줄이지 않는 명랑

 

 


 

 

권이화 시인 / 피아노의 춤

 

 

색색의 바람이 태어나고 죽는 바다에서

하늘에 닿을 음계를 이어 놓는 꿈을 꾸었다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은 88건반으로만 가능한 곳

한 옥타브씩 깃털 같은 바람을 연주할 때 꽃이 핀다

 

한때 한 송이 장미를 따라 구름 속으로 날아갔더라면

손 안에 더 많은 것을 쥐고 있었을까

 

달빛에 화르르 광기를 불사르는 해파리 같은 투명한 음계들

 

검은 건반으로 단념하듯 흐르는 저음의 광시곡

바다를 떠돌고 있는 저 악보들

붉은 태양도 신기루 같이 지나간다

 

믿음을 밟고 가는 흰 건반에 오른손을 올리고

왼손을 올린다

 

한밤중으로 소소리바람 하나하나 불러들이며

오월을 닮은 장미를 연주하면

 

바다가 들어차는 건반마다 달빛이 춤을 춘다

 

 


 

 

권이화 시인 / 가면놀이

 

 

가면을 쓰고 가면놀이를 시작해볼까

 

오늘의 얼굴에는 검은 점을 달고 별자리를 찾는 게임이지

어둠을 헤치고 나온 별의 얼굴은 다섯 모서리를 지닌

붉어지는 강

 

경계를 흩어놓은 빛은 누구도 주고받을 수 없는 반짝 신기루 같은 것

집에서 다른 집으로 떠날 채비를 하는 우리들의 발목으로

수많은 계절이 지나간다

 

점멸등이 꺼지고 커튼이 내리는 지붕위로 날아가는 유성

별의 운행을 점치고 행로를 교신하면서 소용돌이치던 몸의 둘레를 떠나

물음표처럼 휘어질 때

 

새벽을 가로질러 조촐한 의식을 치르듯 뒤돌아본다

누군가 주고 간 석양을 공손히 두 손으로 받던 날처럼 밤하늘의

천칭자리별이 나를 비추며 자주 반짝거린다

 

두 손으로 웃는 물음표를 풀어헤쳐 신기루를 후후 불었지

경계를 흩어놓은 빛이 우리들의 계절을 하나하나 지우며

다섯모서리로 흘러드는 별이 빛나는 집

 

이제 가면을 벗고 가면놀이를 마칠까

 

발목을 분질러도 떨어지지 않던 끈질긴 놀이에 대해

수수께끼가 풀리듯 가면을 씌우고 벗기던 우리들의 이름이

난생처음 광채가 난다

 

수많은 얼굴이 감쪽같이 사라진 뒤에서

 

 


 

 

권이화 시인(본명: 권오성)

1961년 경북 안동에서 출생.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수료. 2014년 『미네르바』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어둠을 밀면서 오래 달리기>. 제12회 동서문학상. 현 미네르바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