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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민 시인 / 저무는, 집
지붕의 새가 휘파람을 불고, 집이 저무네 저무는, 집에는 풍차를 기다리는 바람이 있고 집의 세 면을 기다리는 한 면 이 있고 저물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있어서 저무는 것들이 저무네 저물기를 기다리는 시간엔 저물기를 기다리는 말이 있고 저물기를 기다리지 않는 말이 있고 저무는 것이 있고 저물지 못하는 것이 있어서 저물지 못하네 저물기를 기다리는 말이 저무는 집에 관하여 적네 적는 사이, 집이 저무네 저무는 말이 소리로 저물고 저물지 못하는 말이 문장으로 저무네 새는 저무는 지붕에 앉아 휘파람을 부네 휘파람이 어두워지네 이제 집 안에는 저무는 것들과 저무는 말이 있네 저물지 못하는 것들과 어두워진 휘파람이 있네 새는 저물지 않네 새는 저무는 것이 저물도록 휘파람을 불고 저무는 것과 저물지 않는 것 사이로 날아가네 달과 나무 사이로 날아가네 새는 항상 사이를 나네 달과 나무 사이 저무는 것과 저물지 않는 것의 사이 그 사이에 긴장이 있네 새는 단단한 부리로 그 사이를 찌르며 가네 나무가 달을 찌르며 서 있네 저무는 것들은 찌르지 못해 저무네 달은 나무에 찔 려 저물고 꽃은 꿀벌에 찔려 저물고 노을은 산머리에 찔려 저무네 저무는, 집은 저무는 것들을 가두고 있어서 저무네 저물도록, 노래를 기다리던 후렴이 노래를 후려치고 저무는, 집에는 아직 당도한 문장과 이미 당도하지 않은 문장이 있네 다, 저무네
여성민 시인 / 니스
세계를 보존하는 일은 간단해 흥분하지 않기 엎지르지 않기 니스를 칠하기 윤이 나는 이 세계를 사랑해 첫 작품은 훔친 의자였어 껍질이 벗겨진 세상이 반짝였지 니스는 은유가 벗겨진 세계의 은유 아빠의 등은 흐렸고 엄마의 목은 서툴렀지 밤마다 벽을 보고 앉아 우린 서로의 등에 니스를 칠했지 천국으로 가는 계단이 반짝이고 신드바드의 융단이 반짝이고 새벽엔 반짝이는 배를 타고 여행을 떠났지 어쩌면 베니스였거나 어쩌면 달이었는지도 달에 니스를 칠했어 새로 산 변기처럼 달이 빤짝이는데 지구에 니스를 칠했어 지금 박힌 못처럼 지구가 반짝이는데 배가 등에 충돌하고 있었어 등이 못에 충돌하고 있었어 어쩌면 베니스가 아니라 앨리스였는지도 충돌하지 않기 위해 전력으로 충돌하는 구멍들을 사랑해 사랑하지 않기 찢어버리지 않기 내면에도 듬뿍 니스를 칠하기 니스는 해몽이 사라진 세계의 악몽 빨랫줄이 반짝이고 못이 반짝이고 반짝반짝 두 개의 못처럼 반짝이는 녹슨 눈을 용서해
『에로틱한 찰리』 ,여성민 , 문학동네, 2015년, 40~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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