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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재 시인 / 청사진
건물을 올리며 네 명이 죽었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건물은 보편적인 각도와 높이의 계단을 밟고 차근차근 벽돌을 소모하고 삽과 젓가락을 소모하고 함바집 할머니를 소모하고 간이 화장실과 병실 침대를 소모하고 짱돌을 무더기로 소모하고
본래 이곳에 있던, 집으로 구축된 집들이 소모되며 누군가 기쁘고 누군가 슬펐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건물을 올리며 세 명이 더 죽었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관리자의 관리자의 관리자는 일곱이면 선방이라고 생각했다 일곱이란 숫자는 모나미 볼펜을 한번 안 떼고 그릴 수 있다
청사진처럼 벽돌을 짊어진 저 젊은이는 아직 젊다 젊어서
위험수당을 받으면서도, 일곱 안에 포함된 사람과 같은 솥의 밥을 퍼먹으면서도, 괜찮을 거라 생각한다 절뚝대는 무릎마저 시간이 지나면 괜찮을 거라 생각한다
회복의 반대편으로, 계단을 올라가는 저 젊은이는 차근차근 젊어서 아직까지 젊음이 소모되지 않아서, 그렇게 차근차근 교육으로 오래 축조돼온 희망이, 기대가 견고한 척, 휘어지기 직전의 크레인처럼
바람이 불어도 휘청이지 않도록
이영재 시인 / 깨지기 직전의 유리컵
사이에 놓인 건 깨지기 직전의 유리컵이다 마주 앉은 건 속도뿐이어서 속도를 외면한 채 속도의 너머를 오래 응시했다
나는 허위일 뿐, 허위는 아니다 나는 내 너머를 향해서만 몸이 무겁다
이 투명한 유리컵은 모든 사이에 놓인 채로 반복적으로 다시 놓인다 유리컵 속의 물은 외면 없이도 증발되고
저 속도가 나를 피해 내 너머를 오래보다, 보다 오래 응시하기 때문에 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또다시, 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싸우지 않고도 질 수 있다는 생각은 자만이다
원인을 피해 유리컵을 꽉 쥘 수 있다 유리컵은 여전히 깨지기 직전 외면하되, 믿는 것이 좋다
이 유리컵은 허위가 아니다 주문조차 하지 않은 요리가 식는 동안에도, 건너편의 의자가 속도를 지탱하는 동안에도, 증발한 유리컵 속의 물이 돌아오는 동안에도
확신은 너머를 외면한 채로만 확신된다 허위는 이 유리컵 속에 스스로를 채워 나갈 것이다
저 속도를, 저 너머를 허위로 견디는 건 너머의 내가 아니다 깨지기 직전의 유리컵은 비로소 깨지지 않는다
이영재 시인 / 보드카를 마시는 자리
올바른 문장을 쓰고 있다고 믿는 자들과 맥주잔을 채워놓고 보드카를 마신 일이 있다
리볼버는 몇 가지 장점이 있다 나는 몇 가지의 생각을 잊었다 리볼버의 단점은 내게 아무런 불편을 주지 않는다는 점 가끔이라도 단어를 적어두기로 한다 리볼버는 단점 다음에 장점이다 장점 다음엔 모든 단점이고
누군가 한국으로 갈 비행기 값이 없다며 투덜댔다 다행히 누군가가 버스를 타면 된다고 말해줘서 누군가는 조금 위로가 됐다 누군가가 마신 보드카잔을 숨겼다 누군가는 인물이 자살하는 것을 허락하지는 않았지만 방치했다 방치된 누군가가 잘도 웃는다
이빨을 하루에 하나씩 부러뜨리려면 저 웃음을 방치하는 게 중요하다 연장은 적어놓은 단어에서 적당한 하나 정도를 꺼내 쓸 수 있다
누군가는 미인이어서 불쾌하다 모든 누군가에겐 고유의 매력이 있다 누군가가 여자가 되는 동안 누군가는 오래 앉아 있다 따라서 모든 누군가는 미인인가
강을 건너는 시뮬레이션을 하는 인물을 누군가가 적었다고 했다 자전거를 타면 될 것을, 리볼버의 방아쇠를 당기는 시뮬레이션을 했다 누군가의 문장은 본 적이 없지만 누군가의 말은 조사 하나조차 틀리지 않았다 그런 자들에게 자살을 허락하는 건 안 된다 저 이빨은 뿌리가 깊어 보인다
안주가 떨어져서 안주를 바꿨다 새로운 안주에는 맥주가 어울린다
각자 하나씩 보드카잔을 숨겼으니 게임을 시작해도 될 것 같다고, 자학 한 번 해본 적 없는 인물이 말했다 한국은 남쪽 바다에 있는 섬으로 가, 노래방을 가봐야 한다 노래를 부르는 한국 미인은 누군가의 나와 가깝다
올바른 문장 속에서 갈등하는 인물을 사랑할 자신이 없다 건너편에 있는 누군가가 내 가방에 숨겨진 두 개의 보드카잔을 꺼냈다 방아쇠가 두 번 당겨졌다 올바른 문장을 쓰는 내가 부끄럽다 스스로 차오르던 맥주가 넘치기 시작한다 보드카는 증발하고 결국 순서는 돌아올 것이다 모든 누군가를 위해 틀린 문장을 쓸 자신이 있다
이영재 시인 / 슬럼
연약한 하늘색을 어슬렁대본 적이 있다 무결한 사람에 들어 있는 사람을 구출할 수 없다 옥수수와 참치 옥수수와 참치 통조림을 먹으며 구덩이를 파고 싶은 기분이 든다 슬럼프 안에 담겨 있으면 포근하다 삐뚤빼뚤 열린 하늘을 본다 부피를 본다 색을 본다 경계를 본다 무결을 본다 연 대로 열린 대로 보이는 걸 보고 있다 올려다보는 사람을 본다 그 사람을 구태여 하지 않는다 보다가 본다 운명을 믿는 사람을 보고 있다 시간이 불타는 걸 보고 있다 포로들은 멈춘 버스에서 단잠 중이다 나는 되어가는 기분이다
이영재 시인 / 주방장은 쓴다
눈은 이미 내렸다 새가 날아온다 그리고 새는 날아간다 이곳에서 시가 시작되는 건 아니다
세상엔 먹을 것이 참 없다 먹는 것이 얼마나 괴로웠으면 사람들은 맛있는 음식을 만들 생각까지 했을까
허기가 시보다 나은 점이라면 녀석은 문을 두드릴 줄 안다는 것 요리는 곧 완성 된다 완성되기 전에 이 깨끗한 접시를 쓰레기통으로 던질 수 있을까
내 몸에겐 건강한 학대가 필요하고, 다행히 이곳은 학대에 매우 알맞다 떠나는 새조차 둥지를 훌륭하게 지을 줄 안다
시를 포기하고 시인이 된다는 건 멋진 일이다 더 멋진 건, 죽어서 시인이 되는 일 거짓이다 누구도 시인이 될 수 없고 되어선 안 된다 담배를 문 주방장만이 오래도록 써왔을 뿐이다
휘파람이 휘파람을 불 생각이 없듯 우체통은 붉을 필요가 없다 다행히 라면집은 가끔만 문을 연다
요리는 완성될 필요가 없다 이 깨끗한 접시를 온전하게 버리기 위해
철새가 돌아올 둥지를 삶아 먹고 이사를 할 것이다 겨울과 더 가까운 곳에 주방을 열고 문을 닫을 것이다 어디서든, 시작하지 않기 위해
거짓인 명제가 가득한 접시 위에만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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