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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문재 시인 / 오래된 기도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7.

이문재 시인 / 오래된 기도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기만 해도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기만 해도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만 해도

 노을이 질 때 걸음을 멈추기만 해도

 꽃 진 자리에서 지난 봄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

 촛불 한 자루 밝혀놓기만 해도

 솔숲 지나는 바람소리에 귀 기울이기만 해도

 갓난아기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섬과 섬 사이를 두 눈으로 이어주기만 해도

 그믐달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바다에 다 와가는 저문 강의 발원지를 상상하기만 해도

 별똥별의 앞쪽을 조금 더 주시하기만 해도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삶과 동행하고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인정하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고개 들어 하늘을 우러르며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기만 해도

 

 


 

 

이문재 시인 / 시월

 

 

투명해지려면 노랗게 타올라야 한다

은행나무들이 일렬로 늘어서서

은행잎을 떨어뜨린다

중력이 툭, 툭 은행잎들을 따간다

노오랗게 물든 채 멈춘 바람이

가볍고 느린 추락에게 길을 내준다

아직도 푸른 것들은 그 속이 시린 시월

내 몸 안에서 무성했던 상처도 저렇게

노랗게 말랐으리, 뿌리의 반대켠으로

타올라, 타오름의 정점에서

중력에 졌으리라, 서슴없이 가벼워졌으나

결코 가볍지 않은 시월

노란 은행잎들이 색과 빛을 버린다

자욱하다, 보이지 않는 중력

 

 


 

 

이문재 시인 / 마흔 살

 

 

염전이 있던 곳 나는 마흔 살

늦가을 평상에 앉아

바다로 가는 길의 끝에다

지그시 힘을 준다

시린 바람이

옛날 노래가 적힌 악보를 넘기고 있다

바다로 가는 길 따라가던 갈대 마른 꽃들

역광을 받아 한 번 더 피어 있다

눈부시다

소금창고가 있던 곳

오후 세 시의 햇빛이 갯벌 위에

수은처럼 굴러다닌다

북북서진하는 기러기 떼를 세어 보는데

젖은 눈에서 눈물 떨어진다

염전이 있던 곳

나는 마흔 살

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

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었다

 

 


 

 

이문재 시인 / 문자 메시지

 

 

형, 백만 원 부쳤어.

 

내가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이야.

 

나쁜 데 써도 돼.

 

형은 우리나라 최고의 시인이잖아.

 

 


 

 

이문재 시인 / 노독

 

 

어두워지자 길이

그만 내려서라 한다

길 끝에서 등불을 찾는 마음의 끝

길을 닮아 물 앞에서

문 뒤에서 멈칫거린다

나의 사방은 얼마나 어둡길래

등불 이리 환한가

내 그림자 이토록 낯선가

등불이 어둠의 그늘로 보이고

내가 어둠의 유일한 빈틈일 때

내 몸의 끝에서 떨어지는

파란 독 한 사발

몸속으로 들어온 길이

불의 심지를 한 칸 올리며 말한다

함부로 길을 나서

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

 

 


 

 

이문재 시인 / 적막강산

 

 

그리움은 이렇게 고이면 독이 된다

네가 떠나면서

나는 흉가로 남아

황사의 날들을 지나며 한 방울

독의 힘으로 눈 뜨고 있었다

첫 아이를 위한 태교처럼

그리움을 다스렸다 이슬을 보면

아지랑이를 떠올렸다 바람에 날리는

풀씨를 보며 산맥의 뿌리를 생각했었다

일어나는 먼지를 들판의 기침으로

여기기도 했었고

그러나 흉가에서 내 몸 속에 고이는

물은 피가 되지 못하고

독으로 변하고 있었다 불똥만 닿아도

폭발하고 만다는 그 푸른 독으로

눈물만큼 고이고 있었다

봄날은 고단하게 그렇게 지나갔다

독은 아직 고요하다

 

 


 

이문재 시인

1959년 경기 김포시 출생. 경희대학교 국문과 졸업. 경희대학교 대학원. 1982년 <시운동> 4집에  '우리 살던 옛집 지붕'으로 등단. 시집<내 젖은 구두를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88년) <산책시편>(94년) <마음의 오지>(99년) <제국호텔>(2004년). 김달진문학상(95년) 소월시문학상(2002년), 지훈문학상(2005년), <미당문학상 수상작품집(2014)>. 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과 교수. 현.시사저널 편집위원. 계간<문학동네>편집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