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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신경림 시인 / 떠도는 자의 노래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8.

신경림 시인 / 떠도는 자의 노래

 

 

 외진 별정우체국에 무엇인가를 놓고 온 것 같다

 어느 삭막한 간이역에 누군가를 버리고 온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문득 일어나 기차를 타고 가서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좁은 골목을 서성이고

 쓰레기들이 지저분하게 널린 저잣거리도 기웃댄다

 놓고 온 것을 찾겠다고

 

 아니, 이미 이 세상에 오기 전 저 세상 끝에

 무엇인가를 나는 놓고 왔는지도 모른다

 쓸쓸한 나룻가에 누군가를 버리고 왔는지도 모른다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

 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는지도 모른다.

 

 


 

 

신경림 시인 /그리고 나는 행복하다

 

 

어린 시절 나는 일없이 길거리를 쏘다니기도 하고

강가에 나가 강물 위를 나는 물새들을 구경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카사블랑카의 뒷골목을 어슬렁거리기도 하고

바이칼호의 새 떼들 울음소리를 듣기도 했으니까

 

다 늙어 꿈이 이루어져

바이칼호에 가서 찬 호수에 손도 담가보고

사하라에 가서 모래 속에 발도 묻어보고

파리의 외진 카페에서 포도주에 취하기도 했다

그때도 나는 행복했다, 밤마다 꿈속에서는

친구네 퀴퀴한 주막집 뒷방에서 몰래 취하거나

아니면 도랑을 쳐 얼개미로 민물새우를 건지면서

 

창밖엔 눈발이 치고

모래바람 부는 사하라와 고추잠자리 떼 빨간 동구 앞 길을

번갈아 오가면서, 지금 나는

병상에서 행복하다

 

 


 

신경림 시인

1936년 충북 충주에서 출생. 동국대학교 문리대 영문과를 졸업. 이한직의 추천으로 월간 《문학예술》에 〈낯달〉1955. 12), 〈갈대〉(1956. 2), 〈석상〉(1956. 4)을 발표하며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농무』, 『새재』, 『달넘세』, 『남한강』, 『가난한 사랑의 노래』, 『길』 등과 산문집 『민요기행 1·2』, 『강따라 아리랑 찾아』, 『시인을 찾아서』, 『낙타』 등이 있음. 만해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이산문학상, 단재문학상, 공초문학상, 대산문학상을 수상. 현재 동국대학교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