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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전기철 시인 / 종착역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8.

전기철 시인 / 종착역

 

 

한 꽃송이가 있습니다.

한 꽃송이는 추운 대합실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습니다

한 꽃송이만이 오지 않는

다른 꽃송이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두들 어디론가 떠나버린 대합실에서

한 꽃송이만이 제 몸으로 불을 피우며 기다립니다.

기차가 몇 번 들어왔지만

한 꽃송이는

아직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윽고

막차가 들어옵니다.

우산처럼 안내방송이 펼쳐지고

외국어로 칙칙 이던 기차가 잠들 때까지도

한 꽃송이는

밤새 불을 끄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기철 시인 / 민들레

 

 

개 한 마리가

길가에 핀

민들레꽃을 사랑했네

개는 밥도 먹지 않고

집으로 돌아갈 생각도 잊은 채

꽃을 떠나지 않았네

 

개 울음소리가

산을 넘고

하늘을 건넜네.

아무도 깨어나지 않았네

그리고

세상은 고요했네

 

봄이었네

다시 민들레꽃이 피어났네

그리고

수줍고 수줍은

개 울음소리가 들렸네

 

시간이 폭발해

아침은 저녁이 되고

저녁은 아침이 되었네

 

 


 

 

전기철 시인 / 풍경, 아키이브

 

 

아버지와 결혼한 걸 후회한 어머니가

마늘밭에서 아버지를 하나씩 뽑고 있을 때

어머니를 하와이 해변으로 옮긴다. 포토샵으로

비키니를 입히고 선글라스도 끼워준다. 물거품을 따라

해변이 파랗게 펄럭인다.

매운 해변에서 어머니는 콜록거린다. 오! 불쌍한 어머니

마늘 냄새를 지운 술잔에 데킬라를 붓는다. 재즈에 맞춘 어머니

어지럼증에 시달린 젊은 아버지를 클릭해 온다.

색다른 아버지, 혹은 빌려 온 어머니

피식, 해변에 웃음집이 생긴다.

어머니, 모조 아버지의 팔짱을 끼고 집으로 들어간다.

아버지였던 아버지를 통 잊어버린 채

거울 밖에서 나는

어머니였을 어머니를 암만 찾으려 해도 적절한 색을 찾을 수 없으니

계절을 바꿔보기도 하고 해변을 바꿔보기도 하지만

낯선 풍경 위로 마늘 냄새가 기우뚱거리며 번질 뿐

 

 


 

 

전기철 시인 / 여름 가족

 

 

사물 ,ASMS 아버지 흉내를 낸다. 분명 이 빠진 사기그릇인데 사물 A는 아버지인 척 헛기침을 하며 사물B를 연주한다. 찌그러진 양재기인 사물 B는 내 어머니인 양 사물 A에 맞춰 우는 소리를 낸다. 새벽 기침처럼 울리는 곡조에 돌연 사물 C가 된 내가 참회를 닮은 자조를 뱉으면 길어진 아침의 혈관으로 빗물이 스며든다. 낯선 계절에 갇힌 아침, 칙칙한 초록의 나라, 함석지붕으로 비가 불협화음을 뿌리고, 무채색의 여름 속으로 뛰어 들어간 사물C는 파랗게 질린다

 

 


 

 

전기철 시인 / 한여름 밤의 꿈

 

 

세상은 마법에 걸렸어요.

이스라엘 사람 유리 겔라가

숟가락을 구부리는 밤

모두들 티브이 앞에서

알라딘의 요술 램프를 쓰다듬듯이

숟가락을

밥 먹는 숟가락의 고개를

부러뜨리는 밤

그 한여름 밤에

나는 알바에서 잘려 행복에 시달리며

동물원으로 표범을 보러 갔어요.

그 한여름 밤에

모두들 숟가락을 부러뜨리는 밤에

동물원의 담을 넘었어요.

먼 아프리카의 꿈을 만나러

한여름 밤에

숟가락을 구부리는

그 한여름 밤에

세상의 담을 넘었어요.

유리 겔라가 숟가락을 부러뜨리는 밤에

아프리카의 밤을 만나러 갔어요.

숟가락들이 부러지는 밤에

세상의 담을 넘었어요.

어머니는 아직도 배추를 다 팔지 못해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그 밤에

 

 


 

 

전기철 시인 / 플라타너스

 

 

오늘은 예이츠가 죽은 날

그 날처럼

눈 내리고 춥다.

 

바람이 어둠과 범벅이 되어

헛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는

거리에서

떨고 있는

나의 누이, 플라타너스여,

 

아직 나는

유년의 대륙을 찾지 못해

고독을 어깨에 짊어지고

증오를 직업으로 삼은 채 갈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왜 이렇게

그리움은 쉽게 마모되고

희망은 마약인가.

가진 자들이 사이코패스가 되어 눈을 부라리는

엄혹한 세상에서

나는 저주받은 시나 쓴다.

 

나의 누이, 플라타너스여,

내 유년의 대륙으로 가고 싶다.

그곳에 가서

쓸모없는 나무가 되고 싶다.

 

오늘은 예이츠가 죽은 날

불평 많은 나의 시를 데리고

이니스프리로 가고 싶다.

 

 


 

 

전기철 시인 / 침묵

 

 

너의 어깨 너머에는 나의 과거가 있어, 후회와 거래한 나의 과거가, 미소의 카탈로그를 나열하고 있어. 나의 철사 같은 웃음 속에 묻은 침묵의 페이지를, 네가 읽지 못하도록, 나는, 푸른 권태와 노란 권태 사이, 비무장 지대에서 얼굴을 꺼버리려 하지만, 증오의 손이 침묵의 페이지 밖으로, 뛰쳐나오는 걸, 보는 이가 있어, 나의 손에는, 외로움이 진열되어 있거든. 나의 잘병인 불안이, 잠든 너의 어깨 너머, 어스름의 이끼 가득한 너의 어깨 너머, 비무장지대에서는, 노랑 도깨비 파랑 도깨바, 자본주의가 망하기 전에는, 절대로 서정시를 쓰지 않겠다는, 너의 시가 울고 있어. 후회와 거래를 하고 있어. 손수건이 품위를 잃을 것만 같아, 나의 기도를 묻은, 너의 어깨 너머에서, 젖은 시간이 흘러내려

 

 


 

 

전기철 시인 / 내가 출근할 곳은 어디인가

 

 

왜 그렇게 결근이 잦느냐고 나무라는 시장에게 항변한다. 나는 매일 출근하여 착실하게 손도장을 찍고 있습니다. 내 부러진 손톱자국이 칸칸에 박혀 있는 것을 보지 못하셨나요. 킥킥거리는 내 흔적들이 사무실에서 쪼그리고 있는 게 보이지 않으시나요. 당신의 지구본은 낡았다. 날마다 새로운 나라가 세워지고 전쟁으로 없어지기도 하는 것을 모르는가. 어느 정치가가 아직도 전쟁을 일으키고 있어 사무실이 섬처럼 떠다니나요. 수많은 전쟁으로 바늘 꽂을 곳조차 없는 대륙에서 사무실이 한 자리에 머무를 수 있을 것 같은가. 당신의 지구본은 20세기의 유물이다. 사무실이 한없이 움직이는데 당신은 어디로 출근하고 있단 말인가

 

 


 

전기철 시인

1954년 전남 장흥에서 출생. 전남대와 서울대학 대학원서 석.박사 과정 수료. 1988년 《심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나비의 침묵』『풍경의 위독』『아인슈타인의 달팽이』『로깡땡의 일기』『누이의 방』등과 평론집 『민족문학과 비평정신』 번역서 『시가 있는 금강경』등이 있음. 현대불교문학상, 이상시문학상을 수상. 현재 숭의여자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이며 『유심』 편집위원. 만해학회 회장을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