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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 시인 / 아무 까닭도 없이
돌담을 지나가고 있었다 귀뚜라미가 돌담 속에서 울고 있었다 구렁이가 살던 곳이라고 했다 돌담을 돌아도 돌담이 이어졌다 귀뚜라미가 따라오며 울었다 집으로 얼른 돌아와 목침(木枕)을 베고 누웠다 빈방에 가만히 있었다 귀뚜라미가 따라와 목침 속에서 울었다 방이 어두워지자 밤이 밤의 뜻으로 깊어지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무 까닭도 없이
문태준 시인 / 나와 아버지의 폐원(弊源)
오늘 나의 아버지는 미래의 과일들을 버리네 자두나무를 베어내네 사과나무를 베어내네 밭에서 꽃과 열매가 사라졌네 감쪽같게도 백이십 근의 나무 그늘이 거짓말처럼 노름판에 건 문서처럼 홀연 사라지고 돌밭이 남았네 돌밭은 물혹의 내장 돌밭은 젖을 물릴 수 없는 늙은 젖가슴 아버지는 나의 물혹열매 눈먼 아버지는 오늘 폐원을 가꾸고 내가 태어나던 그해처럼 다시 돌밭을 얻었네 눈먼 아버지는 나의 폐원 아버지는 나에게 이 과수원을 상속하기로 했었지 아버지는 나에게 폐원을 상속하네 썩지도, 아직 열리지도 않은 미래의 과일들을 다 버리고 아버지는 돌무더기 집으로 저녁처럼 홀로 들어가네 늙은 아버지는 참 이상한 농사를 짓지 늙은 아버지는 참 이상한 상속을 하지 상속의 끝이 폐원이라니 농사의 끝이 폐원이라니
문태준 시인 / 공과 아이 -형식(炯植)에게
아이가 공을 몰고 간다 공이 아이를 몰고 간다 아이는 고개를 까닥까닥 흔들고 공은 배꼽을 내놓고 구르고 공중은 한번은 아이를 한번은 공을 둘러업는다 달밤까지 아이가 공을 공이 아이를 몰고 간다 아이가 공을 공이 아이를 몰고 간다 저곳까지 공이 멈추고 싶어 할 때 아이가 멈추고 싶어 할 때 공과 아이는 등을 구부려 둥글게 껴안는다
문태준 시인 / 조금씩 자꾸 웃는 아이
들키지 않도록 살금살금 아무도 없는 부뚜막에서 장독대 낮은 항아리 곁에서 쪼그리고 앉아 토란잎에 춤추는 이슬처럼 생글생글 웃는 아이
비밀을 갖고 가 저곳서 혼자 조금씩 자구 웃는 아이
언제였던가,
간질간질하던 때가 고백을 하고 막 돌아서던 때가 소녀처럼, 샛말간 얼굴로 저곳서 나를 바라보던 생의 순간은
문태준 시인 / 살얼음 아래 같은 데 1
가는, 조촘조촘 가다 가만히 한자리서 멈추는 물고기처럼
가라앉은 물돌 곁에서, 석은 나뭇잎 밑에서 조으는 물고기처럼
추운 저녁만 있으나 야위고 맑은 얼굴로
마음아, 너 갈 데라도 있니?
살얼음 아래 같은 데
흰 매화 핀 살얼음 아래 같은 데
문태준 시인 / 봄볕
오늘은 탈이 없다 하늘에서 한 옴큼 훔쳐내 꽃병에 넣어두고 그 곁서 잠든 바보에게도
밥 생각 없이 종일 배부르다
나를 처음으로 쓰다듬는다
오늘은 사람도 하늘이 기르는 식물이다
문태준 시인 / 살얼음 아래 같은 데 2 -生家
겨울 아침 언 길을 걸어 물가에 이르렀다 나와 물고기 사이 창이 하나 생겼다 물고기네 지붕을 튼 살얼음의 창 투명한 창 아래 물고기네 방이 한눈에 훤했다 나의 생가 같았다 창으로 나를 보고 생가의 식구들이 나를 못 알아보고 사방 쪽방으로 흩어졌다 젖을 갓 뗀 어린것들은 찬 마루서 그냥저냥 그네끼리 놀고 어미들은 물속 쌓인 돌과 돌 그 틈새로 그걸 깊은 데라고 그걸 가장 깊은 속이라고 떼로 들어가 나를 못 알아보고 무슨 급한 궁리를 하느라 그 비좁은 구석방에 빼곡히 서서 마음아, 너도 아직 이 생가에 살고 있는가 시린 물속 시린 물고기의 눈을 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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