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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천수호 시인 / 사월의 것을 그대로 두어요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7.

천수호 시인 / 사월의 것을 그대로 두어요

 

 

절반으로 가를 줄 몰라서 산이라 했지요

그땐 그랬어요

 

한 모금을 뱉어내고 한 입 가득 머금은 것을 골짜기라 했지요

모를 때의 일이어요

 

긴 말이 필요 없을 때였어요

 

충격을 가했던 자리에만 생강나무꽃이 터진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래서 아프다 말하는 사람을 끝까지 잡지 못했어요

당신 몸에서 생강냄새 나는 꽃이 터질까봐요

 

꽃이 얹히면 다 내 것인 줄 알았던 시절이 있었다고

처음으로 내가 모르는 말을 할 때도

산을 가를 생각은 꿈에도 없었어요

 

피를 흘리는 것은 이미 뒤늦은 사태라는 것을

진달래가 피기 전에는 몰랐거든요

 

역병을 밟고 줄줄이 삭정이 되어버린 가지를 헤치며

세상 비겁한 일이 아플 때 놓는 일인 것을

잎에게도 물어보지 못한 두어 마디 말로 이별인사를 했지요

 

오늘 갔지만 오래 전에 보낸 사람이라 해두어요

 

꽃도 놓고 잎만 단 채 하늘을 꺾어버린 가지 때문에

핏물이 고여서 이름이 된 사월이 있었다는 걸 겨우 알게 되었지요

 

반반 잘 나누려고 구름이 한번 치고 가는 산을

내가 어찌 사월의 것이라 할 수 있겠어요

 

계간 『시산맥』 2021년 봄호 발표

 

 


 

천수호 시인

1964년 경북 경산에서 출생.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되어 등단. 명지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졸업. 시집으로 『아주 붉은현기증』(민음사, 2009)과 『우울은 허밍』(문학동네, 2014)이 있음.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역임. 현재 명지대학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