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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공광규 시인 / 햇살의 말씀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9.

공광규 시인 / 햇살의 말씀

 

 

세상에 사람과 집이 하도 많아서

하느님께서는 모두 들르시기가 어려운지라

특별히 추운 겨울에는 거실 깊숙이 햇살을 넣어주시는데

 

베란다 화초를 반짝반짝 만지시고

난초 잎에 앉아 휘청 몸무게를 재어보시고

기어가는 쌀벌레 옆구리를 간지럼 태워 데굴데굴 구르게 하시고

의자에 걸터앉아 책상도 환하게 만지시고

컴퓨터와 펼친 책을 자상하게 훑어보시고는

연필을 쥐고 백지에 사각사각 무슨 말씀을 써보라고 하시는지라

 

나는 그것이 궁금하여 귀를 세우고 거실 바닥에 누웠는데

햇살도 함께 누워서 볼과 코와 이마를 만져주시는지라

 

아! 따뜻한 햇살의 체온 때문에

나는 거실에 누운 까닭을 잊고 한참이나 있었는데

지나고 보니 햇살이 쓰시려고 했던 말씀이 생각나는지라

 

"광규야, 따뜻한 사람이 되거라"

 

 


 

 

공광규 시인 / 시래기 한 움큼

 

 

빌딩 숲에서 일하는 한 회사원이

파출소에서 경찰서로 넘겨졌다

점심 먹고 식당 골목을 빠져나올 때

담벼락에 걸린 시래기 한 움큼 빼서 코에 부비다가

식당 주인에게 들킨 것이다

“이봐, 왜 남의 재산에 손을 대!”

반말로 호통치는 식당주인에게 회사원은

미안하다고 사과했지만

막무가내 식당주인과 시비를 벌이고

멱살잡이를 하다가 파출소까지 갔다

화해시켜보려는 경찰의 노력도

그를 신임하는 동료들이 찾아가 빌어도

식당주인은 한사코 절도죄를 주장했다

한몫 보려는 식당 주인은

그동안 시래기를 엄청 도둑맞았다며

한 달치 월급이 넘는 합의금을 요구했다

시래기 한 줌 합의금이 한 달치 월급이라니!

그는 야박한 인심이 미웠다

더러운 도심의 한가운데서 밥을 구하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래, 그리움을 훔쳤다, 개새끼야!’

평생 주먹다짐 한 번 안 해본 산골 출신인 그는

경찰이 보는 앞에서 미운 인심에게

주먹을 날렸다

경찰서에 넘겨져 조서를 받던 그는

찬 유치장 바닥에 뒹굴다가 선잠에 들어

흙벽에 매달린 시래기를 보았다

늙은 어머니 손처럼 오그라들어 부시럭거리는,

 

 


 

 

공광규 시인 / 무량사 한 채

 

 

오랜만에 아내를 안으려는데

‘나 얼마만큼 사랑해!’라고 묻습니다

마른 명태처럼 늙어가는 아내가

신혼 첫날처럼 얘기하는 것이 어처구니없어

나도 어처구니없게 그냥

‘무량한 만큼!’이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무량이라니!

그날 이후 뼈와 살로 지은 낡은 무량사 한 채

주방에서 요리하고

화장실서 청소하고

거실에서 티브이를 봅니다

내가 술 먹고 늦게 들어온 날은

목탁처럼 큰 소리를 치다가도

아이들이 공부 잘하고 들어온 날은

맑은 풍경소리를 냅니다

나름대로 침대 위가 훈훈한 밤에는

대웅전 꽃살문 스치는 바람 소리를 냅니다

 

 


 

 

공광규 시인 / 흙집 사리

 

 

오래 살아서 장마에 쿵! 하고 무너진

시골 헌집 옆구리를 삽으로 퍼내는데

깨진 장독과 버려진 사기그릇과

녹슨 쇠붙이들이 쏟아져 나온다

조각난 오줌독과 개밥그릇도 나뒹군다

째그락거리던 식구들의 말소리와

염생이와 강아지와 동생들이 놀던 소리도 들린다

마침, 햇살이 들자

깨진 장독과 사기그릇과 오줌독과 개밥그릇과

쇠붙이 모서리들이 반짝거린다

수십 년 살다 죽은 흙집 사리다

 

 


 

공광규 시인

1960년 충남 청양에서 출생.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1986년 《동서문학》을 통해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 『대학일기』, 『마른잎 다시 살아나』, 『지독한 불륜』, 『말똥 한 덩이』 등과 시론집 『이야기가 있는 시 창작 수업』, 『시 쓰기와 읽기의 방법』 그리고 논문집 『신경림 시의 창작방법 연구』등이 있음.  제1회 신라문학대상과 제4회 윤동주상 문학대상, 현대불교문학상, 신석정문학상2020. 제9회 녹색문학상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