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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상국 시인 /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9.

이상국 시인 /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부엌에서 밥이 잦고 찌개가 끓는 동안

 헐렁한 옷을 입고 아이들과 뒹굴며 장난을 치자

 나는 벌서듯 너무 밖으로만 돌았다

 어떤 날은 일찍 돌아가는 게

 세상에 지는 것 같아서

 길에서 어두워지기를 기다렸고

 또 어떤 날은 상처를 감추거나

 눈물자국을 안 보이려고

 온몸에 어둠을 바르고 돌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일찍 돌아가자

 골목길 감나무에게 수고한다고 아는 체를 하고

 언제나 바쁜 슈퍼집 아저씨에게도

 이사 온 사람처럼 인사를 하자

 오늘은 일찍 돌아가서

 아내가 부엌에서 소금으로 간을 맞추듯

 어둠이 세상 골고루 스며들면

 불을 있는 대로 켜놓고

 숟가락을 부딪치며 저녁을 먹자

 

 


 

 

이상국 시인 / 꽃

 

 

노래하면 몸이 아파

그러한 그리움으로 한 서른 해 앓다 일어

피는 꽃을 보면 눈물 나네

노래로는 노래에 이르지 못해

먼 강 푸른 기슭에서 만났다 헤어지던 바람은

흐린 날 서쪽으로만 가고

작고 작은 말을 타고 삶의 거리를 가며

아름다운 것을 소유할 수 없다는 걸 알기까진

나는 너무 많이 울었네

한 서른 해 아픔으로도

사랑 하나 깨우지 못하여

그러한 그리움으로

마당귀 피는 꽃을 보면 눈물나네

 

- 이상국 시집 <동해별곡> 1985

 

 


 

 

이상국 시인 / 소를 팔며

 

 

가는구나

반추의 슬픈 식욕을 씹으며 떠나가는

그대 발굽의 아우성.

첫새벽 어둠을 한 바리씩 실어 내

건초를 바꾸던 그대 조상은

죽어서도 영영 자갈밭을 가고.

보이는구나

굽어서 아픈 논두렁 밭두렁을 돌아

저문 들로 다시 오는

그대 후생의 고삐가 보이는구나.

 

 


 

 

이상국 시인 / 해와 달은 쉬지 않는다

 

 

주오일제가 되고도

우리나라 논에서는

토요일에도 벼가 패고

비는 일요일 새벽에도 온다

땅이 끝없고

나라가 땅마다 가득해도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그날이 그날이어서

고래는 주말에도 새끼에게 젖을 물리고

사과는 낯을 붉히며 익는다

 

 


 

이상국 시인

1946년 강원도 양양에서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졸업. 1976년 《심상》에 시 〈겨울 추상화〉 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동해별곡』(1985),  『내일로 가는 소』(1989), 『우리는 읍으로 간다』(1992), 『집은 아직  따뜻하다』(1998),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2005), 『뿔을 적시며』(2012) 등이 있음. 백석문학상 · 민족예술상 · 유심작품상, 2014. 제19회 현대불교문학상 등을 수상. 유심지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