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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철 시인 / 아내는 늘 돈이 모자라다
아내는 나를 조금씩 바꾼다. 쇼핑물을 다녀올 때마다 처음에는 장갑이나 양말을 사오더니 양복을 사오고 가발을 사오고 이제는 내 팔과 다리까지도 사온다. 그때마다 내 몸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투덜거리지만 아내는 막무가내다 당신, 이렇게 케케묵게 살 거예요, 하면 젊은 아내에게 기가 죽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만다 얼마 전에는 술을 많이 마셔 눈이 흐릿하다고 했더니 쇼핑몰에 다녀온 아내가 눈을 바꿔 끼라고 한다 까무러치게 놀라며 어떻게 눈까지 바꾸려고 하느냐. 그렇지 않아도 걸음걸이가 이상하다고 수군거린다고 해도 그건 그 사람들이 구식이라 그래요, 한다 내 심장이나 성기까지도 바꾸고 싶어 하는 아내는 늘 돈이 모자라서 쩔쩔맨다 열심히 운동을 하여 아직 젊다고 해도 아내는 나를 비웃으며 나무란다 옆집 남자는 새 신랑이 되었어요. 당신은 나를 위해서 그것도 못 참아요, 한다 시무룩해진 아내가 안쓰러워 그냥 넘어가곤 하는데 아침 일찍 아내보다 먼저 일어나 거울 속에서 내 자신이었을 흔적을 찾느라 얼굴을 아무리 뜯어보아도 내 모습이 없으니 밖에 나가면 검문에 걸릴까 두려워 일찍 귀가하곤 한다
전기철 시인 / K ― 프란츠 카프카에게 바침
K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K에서 이제 가족이라고는 물고기 한 마리밖에 없다. 새가 되고 싶어 하는 물고기 K에 불시착한 뒤 물고기는 바다 꿈에 사로잡혀 있다 물고기를 위하여 K를 떠나야 한다. K는 지문의 끝. 부서진 난간에 걸린 해처럼 지도에 없는 도시다 완벽한 보완의 도시, 도서관과 인터넷으로 무장한 K에서 내 물고기는 새를 꿈꾸는 것조차 들키고 만다 물고기를 위하여 K를 떠나야 한다. 도시의 심전도를 읽을 수 있는 도서관의 비밀스런 문서를 빼낼 기회만을 엿보며 시그마 빌딩에서 잔고 바닥난 신용카드처럼 깊이 숨어 있다가 창문을 통해 종이비행기를 날린다 물고기의 꿈을 가득 실은 채 산돼지처럼 어디에서도 안주하지 못하며 내 그림자들이 꾸미고 있는 속임수를 따라 물고기를 닮은 눈동자를 빛내면 바다를 가장한 스타벅스에서 사이렌이 울린다. 무균처리 된 도시를 벗어나기는 힘들 것 같고 물고기에게 바다 냄새라도 맡게 하려고 도서관 깊은 창가에 서면 창밖에 목매달고 있는 무수한 편지들 저 멀리 십자가를 주렁주렁 단 교회들이 엉금엉금 걸어오고, 소독내 퍼진 하늘이 파랗게 질린다 K는 우주의 어느 은하를 떠돌고 있는가. 지금 내리고 싶다
전기철 시인 / 사도우 문
배우 옥소리가 간통으로 고소를 당했다. 나는 도쿄로 도망쳐야 한다
이웃집 형은 직장을 잃고 개 사냥꾼으로 나섰고 친구동생은 서른 살이 넘었는데도 장난감이나 들고 다니며 공원에서 하루를 보낸다
우리 동네 풍경은 더 이상 숨 쉴 곳이 없어 새들도 아침이면 와서 울지 않는다. 나는 도쿄로 도망 갈 날짜만을 달력에다 바꿔 단다
오늘은 선배를 따라 한강으로 가야겠다. 선배는 또 다른 세상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며 눈이 휘둥그레질 돌을 발에 묶고 강바닥으로 내려가겠지. 선배가 나를 쳐다보면 나는 곧 도쿄로 가야 한다고 변명하리라
아침이면 해는 샛노랗게 떠오르고 담쟁이가 우울한 밤을 풀어헤치기라도 하려는 듯 담장에서 고개를 살랑거리지만 개을 한 마리도 잡지 못한 형이 정육점으로 기름 덩어리를 얻으러 가는 발소리, 친구 동생이 골목에서 장난감을 굴리는 소리가 하루를 두드린다
나이가 들었는데도 앳된 옥소리는 카랑카랑하다. 나는 다음 주에는 꼭 도쿄로 도망치리라 다짐하면서 선배가 돌멩이를 발에 묶고 강바닥으로 내려가서 올라올 수 있을지 아니면 새로운 세상을 찾을지 궁금해서 창문을 소리 나게 연다
하늘은 금세라도 무슨 말을 뱉을 것만 같다
전기철 시인 / 언덕에 올라 -척호陟岵,『시경詩經』위풍魏風으로
불빛이 멀리 비척거린다
나뭇가지에 걸린 딱따구리가 철컥, 철컥, 점호를 하고
발아래 풍경이 가뭇없이 무너진다
귀가 웅웅, 내일은 어디로 가야 하나
(너무 멀리 와 버린 건가)
약을 끊지 말았어야 했다. 쥐라도 키우든지
나뭇가지에 매달린 비닐봉지가 운다
옥련암의 댓잎은 아직 푸르겠지
와락, 안개가 얼굴을 묻어버린다
전기철 시인 / 삼천포
너는 비스듬히, 갸웃한 이라는 말 속을 떠도는 비긋이, 혹은 유년의 꿈처럼 비릿한, 가끔 밤으로 기우는 말들이 모여 있듯, 어슷히
나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너는 삼천포에 갔다. ‘아득하면 되리라’를 생각하며, 아득하도록 비스듬히, 바다를 내려다보는데
비긋이 날아가는 구름의 손가락들, 빗물질적으로 녹아내리는 바람의 등고선을 따라, 뭉그러지는 너의 독백들, 낭떠러지의 목소리, 뿌리 내리지 못한 너의 이름들이 비인칭으로
구깃구깃, 그리고 까마득히
전기철 시인 / 뭅
쨍, 날카로운 햇빛의 일요일 나는 사건이 된다 즉홍연주 같은, 끄나풀 같은, 수배자 같은
일그러진 빗방울을 주렁주렁 달고 오빠가 온다. 날 알아볼까
내일과 내 일에서 헤적이는 네일을 매단 봄바람이 출렁인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그때 만나던 곳으로 와
나는 사건이다 압생트 같은, 할러데이 같은
욱, 하고 달나라로 날아간 나비 같은 베트남 소녀의 노래 같은, 공중화장실 계단에서 기다리는 모자 같은
그 골목
툭, 소리를 내며 마지막 비행을 꿈꾸는 나뭇잎 같은
전기철 시인 / 사람
네 발 달 린 침 대 네 발 달 린 의 자 달 린 다 초 원 을 향 해 비 는 내 릴 것 이 다 태 양 너 머 네 발 달 린 기 린 을 따 라 네 발 달 린 악 어 가 뛰 어 가 고 네 발 달 린 자 동 차 가 달 리 는 데 바 보 마 냥 두 발 만 달 고 겅 중 거 리 며 뛰 는 장 대 처 럼 절 름 거 리 는 길 쭉 한 허 우 대 하 나 네 발 이 었 다 가 두 발 이 었 다 가 가 끔 은 세 발 이 기 도 한 약 골 하 나 저 멀 리 네 발 달 린 것 들 을 쫓 는 듯 쫓 기 는 듯 두 발 이 었 다 가 세 발 이 었 다 가 오 귀 여 운 앞 발 을 잃 어 버 리 고 겅 중 겅 중 쫓 는 듯 쫓 긴 다
전기철 시인 / 가벼움에 대하여
이른 아침, 한없이 순환하는 지하철을 탄다. 꿈들은 모두 나의 반대편에 앉는다. 나는 기우뚱하는 차를 견딘다. 속도가 빨라질수록 지하철은 한쪽으로만 달린다. 좌석에 앉아 경디기에는 나는 너무 가볍다. 머리가 빈다. 가슴이 울렁거려 일어설 수가 없다. 뱃속에서 허한 것들이 목을 타고 올라오려는 찰나, 참을 수 없이 가벼워져 몸이 공중으로 뜬다. 겨우 손잡이를 잡고 견디면서 이렇게 부당한 천칭에서 내릴 수 있을까 걱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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